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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특성(1) (고전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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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정의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정의되는 순간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눈물을 정의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눈물이란 물과 염분의 결합체라고 정의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정의가 과연 어머니의 눈물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정의되는 순간 이미 그 참된 정체를 잃어버리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 의 의미가 바로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4절 이하의 내용은 사랑의 행동을 뵤사하는것 뿐입니다. 그것은 차라리 사랑의 특성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 다.

 여기 본문에서 우리는 적어도 열다섯 가지의 사랑의 특성들을 찾을 수 있습니 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빛이 프리즘을 통과할 때 나타내는 무지개빛 다양한 색 깔들과 같습니다. 이들은 한 마디로 사랑의 스펙트럼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본질에 있어서 생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형용사일 수 없습니다. 움직이는 동사입니다. 특히 아가페의 사랑의 특성이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이 사랑의 특성들을 자세히 묵상해 보십시오. 단 한 번도 여기에서 사랑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 혹은 감상적인 이 미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성경적 사랑은 구체적이며 실천적이고 의 지적인 행동 그 자체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묘사된 15가지의 행동들은 어떤 원칙에 의한 배열일까요 생각 컨대 이것은 고린도교회에서 가장 결핍된 사랑의 영역으로부터 순서적으로 다룬 것이라는 추측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주님의 인격과 삶 속에 나타난 사랑의 특성을 따라 열거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성도들의 사랑에 대한 유일한 모방의 표본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외에 다른 누구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고린도교회의 문제들과 주님의 삶을 중심으로 한, 두가지 관점에서 여기에 열거된 사랑의 다양한 특성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는 진정한 아가페적 사랑의 특성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첫째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이 오래 참는다고 하는 말의 헬라원어는 "마크로뒤메오" 라는 것으로 그 뜻이 너무도 깊고 오뵤하여 사전을 보면 이 말을 번역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말을 간단히 대치할 수 있는 다른 말이 없 기 때문입니다. 이 "마크로뒤메오"라는 말은 그저 "참는다"고 하는 단순한 표현 그것만 가지고는 의미의 전달이 크게 부족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이야기의 참 음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참는다"고 하는 것은 오래 참으면서 불평없이 참는 것, 그리고 참는 이유를 알고 기뻐하는 참음입니다. 그러니까 찡차찡거리거나 저주스러운 마음으로 견딘다거나,와신상담의 자세로 인내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지금에 필요한 인내를 아무런 의문이나 불평함이 없이 기쁨으로 소화하면서 참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로마서 2장 4절에서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을 표현하는데 쓰여진것과 같은 의미의 낱말입니다.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아주시고 죄인을 참아주시는 그 오 랜 오랜 기다림! 그것을 가르쳐서 이 "마크로뒤메오"라고 말합니다.

지나간 세기의 유명한 무신론자 중에 로버트 잉거솔 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무신론 강의 도중에 탁상에 시계를 꺼내 놓고 "내가 하나님께 5분간 만 시간을 주겠다. 내가 5분동안 하나님을 저주할 터인데 그 동안에 나를 죽이 기를 바란다. 내가 만약 죽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없거나, 있어도 실패자에 불과 하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5분이 지난 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인간이 승리자요 신은 실패자라고 외쳤습니다. 이 이댜기를 전해 들은 신앙인 데오도르 파커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런 흥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실패한 것일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5분간으로 단축시켜 보려고 한 잉거솔 의 시도가 패배한 것이 아닐까! "

옳습니다. 주께서는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그의 백성들이 또 한 이 오래 참음의 옷을 입게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성 경은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라고 충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아름다운 인격 의 옷을 입는 대신 서로 형제끼리 분노하며 재판하고 송사하는 부덕을 빚어 그리 스도의 영광을 더럽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나의 실수나 잘못과 상관없이 오해받고 수모를 겪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마다 주 님을 바라보십시오. 완전하시며 절대적으로 거룩하셨던 그분이 받으셨던 오해와 부끄러움의 별명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미치광이, 귀신 들린자, 먹기를 탐하는 자,술을 즐기는 자,사마리아 사람, 나사렛 사람, 귀신의 왕, 세리와 죄인의 친 구,창기의 벗,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한 자"-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일체 의 대답을 거부하시고 다만 십자가를 향해 걸으셨던 침묵의 행진을 생각해 보십 시오,

그러나 어떤 분이"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 라고 물으실지 모릅니다. 재미 있는 것은 "사랑은 영원까지 참고"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졈입니다. "오래참고" 입니다. 언젠가는 오래 참음의 마지막 순간이 옵니다. 고통은 고통을 위해 참 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위해 참는 것입니다. 마침내 어느 날 고통이 종식되 기 위하여 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가 참된 사랑으로 참을 때 언젠 가 우리의 고통스러움은 반따,시 종식된다는 희망을 약속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래 참음이란 고통의 원인인 죄나 악과 대결하면서도 고통의 현장을 수용하여 고통과 함께 살아가며 마침내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는 창조적인 삶의 예술입니다 " 라고 말한 루이스 스미드 의 말을 동의합니다.중앙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던 죠지 아틀레이라고 하는 젊은 선교사는 원주민들의 창과 몽둥이에 맞아 죽어가면 서도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영국제 원체스트 연발총의 방아쇠를 끝까지 당기지 않 았다고 합니다. 그대로 쏘면 저들을 죽이고 자기는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선교사는 자기를 죽이러 오는 사람들인 줄을 알면서도 끝까지 총을 쏘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방아쇠 한번 잡아당기면 끝날 일이겠으나 그는 결코 그 일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내가 저 사람들을 죽이게 되면 이 마을 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는 영영 끝이 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을 죽인 자가 전하는 예수를 누구인들 믿고자 하겠느냔 말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끝까 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총을든 그대로 개처럼 끌려가서 사지를 찢기며 비참하 게 죽게됩니다. 이렇게 죽은 다음에 보니 그에게는 그런 놀라운 총이 있었고 탄 환도 열발이나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그 원주민들은 뒤늦게나 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그런데 그 인내함이 결코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 는 저 앞을 바라보기 때문이며 인내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 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사랑은 온유합니다

이 "온유"라고 하는 말로 번역된 헬라 원어 "크레스토스"역시 다른 말로 쉽게 번역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단순히 심리적 상태의 온유만을 맣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향하여 온유를 베푸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번역에는 "카인드"라 하여 친절로,그리고 또 다른 어떤 번역에는 " 온유"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온유라는 말로 번역을 한 것인데 어찌 생각하면 이 둘을 합친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이 온유는 단순한 생각에서의 온유가 아 닌 "행동적 온유"를 의미합니다. 이는 악한 세대에 대하여 끝까지 참는 인애가 있어야 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친절을 베푸는 온유의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내가 귀한 것이되 인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어쩌 면 참는데에는 제법 소질이 있는 생활을 해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 려운 시집살이를 견디느라 "귀머거리 3년이요, 병어리 3년이라"는 속담까지 만들 어 놓고 참고 또 참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참다가 한번 터 지게 되면 걷잡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참지 않은 것만 못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계코 참아온 것이 아니라 버티어 온 것이요 벼르며 지내온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참는 것만이 아니라 온 유합니다. 그러기에 친절하며,자기에게 지워진 바의 어려움을 다 소화하면서 오 히려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향애 온유를 베푸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두고 보아도 살아있는 동 안은 부드럽고, 또한 같은 사람이라하더라도 어린 아이일수록 더욱 부드럽습니 다. 그런가하면 이제 나이들어 늙어 갈수록 거칠고 딱딱해졌다가 마지막 호흡이 끊어지고 나면 아주 차갑게 굳어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정신적 세계에 있어서 도 살아있는 정신을 소유한 사람의 인간성은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그러나 이미 죽어버린 사람, 심장이 멎고 한편으로 썩어가고 있는 그러한 인간성이란 완전히 굳어진 것이어서 전혀 여유를 찾을수가 없습니다,

부부가 다 대학 교수인 어떤 가정이 오랫동안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 분상으로나 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분들이며 남들이 보기에는 그럴듯한 부러운 가정이요 흔히 말하는 잉꼬부부로 불리워지는 가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인들 사이에는 편치 않은 문제가 언제나 깔려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 팽팽하게 맞서 있기 때문인 것으로 그저 농담으로 주고 받는 말에도 "누가 더 크냐" 는 것 때문에 결코 부드러움이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 랜 세월을 지내오는 중 마침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들도 모 르는 사이에 변화가 되어 어느날 무슨 이야기를 하는 중에 남편이 아내에게 말하 기를 결혼 후 처음으로 "여보 내가 잘못했오 미안하오."라는 이 한마디를 하더라 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평범한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이 아내는 결혼생활 20 년에 처음으로 그 한 마디를 듣게 되자 너무도 고마와서 사흘 동안을 울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은 온유합니다. 그런데 "미안합니다"라는 그 말 한 마디를 못하 고 사는 그 사람이 사랑을 아는 자이겠습니까 모르는 자이겠습니까 그 많은 사랑의 선물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 많은 사랑의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졌느냔 말입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먼저는 자기자신에게 온유합니다. 사랑의 생리가 그러하 고 사랑의 형태가 그러합니다. 그 띠문에 동물도 사랑을 하면 유순해지고 사랑 앞에 고요해지며 목소리가 부드러워지는 것을 봅니다. 진정 사랑을 안다는 것은 스스로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 앞에서 자기가 낮아 지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말로 사랑을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 곧 성서가 말하는 바의 사랑은 온유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스스로 낮아져 어느 사이에 자기가 소멸되어 버리고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아직도 자기 사랑에 몰두되어 있으면서 계속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온유와 친절을 나타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 본 래의 색깔입니다. 따라서 친절을 생산하지 못하는 사랑은 비록 순간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욕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두고 사랑이라고 착각 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사랑은 온유하고 친절하며 겸손한 행위로, 그 음성까 지도 부드럽게 나타납니다. 이는 동물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사랑할 때의 울음소리는 아주 부드럽고 은근하다 그럽니다. 개나 고양이를 키울 때에도 보면 어쩌다가 사람이 그 새끼를 다치게라도 하게 되면 새끼들을 사람들의 눈길이 닿 지 않는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에 그 옮기는 방법이 업고 가는 것도 아니고 안고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어미가 새끼의 목덜미를 물고는 끌고 가는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몹시 가엾어 보입니다마는 그렇게 물려 끌려가는 새끼들은 좋아서 따라갈 뿐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겉 으로 보기에는 이빨로 무는것 같지만 실은 이빨이 아닌 잇몸으로 물고 있는 것입 니다. 따라서 거기에도 온유함이 있고 부드러움이 있기에 목덜미를 물리고 끌려 가면서도 반항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갖 그러한 장면 속에서도 주고 받는 사랑 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온유하며 상대를 향한 보호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던 습관과 생각이 바뀌어져 이제는 상대의 몸과 인격과 명예를 보호하는 의식으로 나타나게 됩니 다. 그 강했던 자기 욕망은 무너지고 다른 사람을 위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 에 정성이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온유는 진정한 승리를 가져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해 주신 산상보 훈에서도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코 강포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선 보기에는 힘이 있고 강한 자가 이길것 같지만 성경은 분명히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 그가 복을 받고, 그가 승리하며, 그가 왕권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가 온유한 자인가 하는 거기에 최종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잠언 15장 1절 말씀에 보면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포악한 말을 하더라도 대답하는 자가 부드럽게 대하면 그 노가 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구 음성이 더 크냐며 서로 싸우고 있으니 그 다툼, 그 문제가 언제 끝이 나겠습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온유한 자가 이긴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누구나 다 자동차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 동차는 그 구조를 알고 보면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다 단단한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물체입니다. 이처럼 강한 쇠와 쇠가 맞물려 있으면서도 무사히 잘 돌 아가게 되는 것은 쇠와 쇠 사이에 윤활유라고 하는 부드러운 것이 있기 때문입니 다. 만약 자동차에 이 윤활유라는 것이 빠지게 되면 단 1분도 못가서 자동차는 불이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거친 세대에 없어서는 안될 윤활유 구실을 할 온유한 사랑은 어디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서로 마찰하고 부딪쳐서 깨 어지기 일보 직전에 이르렀는데 이를 방지할 사랑의 온유함이 어디에 있느냔 말 입니다. 이 온유함! 이 윤활유가 없이는 불원간에 폭발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거치른 세대의 인간을 과연 그 무엇으로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참 사랑! 오직 진정한 사랑만이 치유의 근원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디 모데후서 3장 1절에서 3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내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 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 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 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 며" 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대는 참으로 거칠고도 사나와지고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그 대응책 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겠습니까 한갖 개를 보면서도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면서 "나는 너를 미워한다" 하면 좋아라고 꼬리를 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한다 "고 하면서도 고함을 지르면 대어들면서 문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때에 "너 왜 내가 사랑한다고 했는데 무느냐" 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에서의 문제는 사랑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목소리가 높았느냐<낮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논리로 설명할 것입니까 돈으로 계산할 것입니까 원하는 바 사랑의 진실은 온유함에 있습니다. 온유한 음성으로라면 미워한다면 어떻고 죽 인다한들 무슨 걱정입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목소리가 크다고 전해지는 것도 아 니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에는 오직 온유함과 겸손 이 있을 뿐 복잡한 논리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단순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참된 온유와 겸손에 있고 또한 그러합니다. 다시 한번 "나 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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