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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특성(5) (고전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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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자신의 죄를 합리화 시키는 것입니다.

 고전5장1절이하에 보면 불륜의 죄를 저지르는 고린도교회 일부 성도에 대해 말 씀하면서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않느 냐고 꾸짖고 있습니다. 6절에서는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만하다" "자랑하다" 이말이 무슨 말입니꺄 바로 자신의 죄를 합리화 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게 뭐그리 잘못된거야 하면서 오 히려 큰 소리치는 사람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도덕성의 기준 을 내기준에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행동에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합리화 시킬것 아무도 없습니다.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사 랑의 속성입니다.

 2. 타인의 불의를 즐기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사람이 있을까요 네 간음한 여인을 개처럼 끌고다니면서 온갖 손가 락질을 다하뎐 바리새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 물 론 그여자의 반 울법적 행동에 분개해서 그럴수도 있지만 더나아가서 그들은 그 여인의 불의를 자꾸 말함으로 나는 저여자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것입 니다.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잘못입니다. 평소 내가 좋지 않게 생각하던 사람 의 불의가 드러났을때 거봐라! 꼴좋다! 이런일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우리딸이름-희진 (한자:기쁠희 참진 혹은 진리진) =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의미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한 모습을 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요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그리스도의 마 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힘이없고 우울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녀를 보시기 를 원치않으시며 기쁨이 충만한 모습의 자녀들을 보시기를 원하시고 기뻐하십니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주신것은 우리가 기뻐하며 행복해 하기를 원하여 서 주신 것이지 어두운 얼굴로 괴로와하고 살라고 주신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진정 예수님을 잘믿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항상 웃는 사람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일에도 감사하고 저런일에도 기뻐하는 사람입니 다. 이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 기뻐하되 무엇과 함께 기뻐해요 (진리)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 말씀 그러므로 진리와 함께 기뻐하라는 뜻은 진리만을 (말씀)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진리를 지키라는 뜻입니다.

유명한 순교자 죤후스는 순교하기직전 마지막 한번더 결심을 돌이키면 그를 풀어 주겠다는 말을 듣고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입술로 증언한 바를 이제 피로서 보증하기를 원한다"고 말입니다. 왜 그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 했습니까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를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으로 더불어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참기쁨을 주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이 알지못하는 참기쁨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힘든일이 있어도 예수님 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성도가 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를 알 때 행복있네 그 사랑안에 거하므로 내맘이 참변화되었네 주는 나의 행복 참내기쁨 죽음이 두렵잖네 난 발견했네 내 구주 예수를 예수님을 알 때 행 복있네 그 사랑안에 거하므로 내맘이 참변화되었네 주는 나의 행복 " 여러분! 예수님이 참 여러분의 행복이십니까 기쁨이십니까 어떤일이 있어도 예수님과 더불어 기뻐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1. 오늘 본문 말씀에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을 참는다"고 할 때의 이 "참는다" 는 말은 번역상으로 보아 그 의미 전달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헬라 원문 대로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참는다" 로 번역된 헬라 원어는 " 스테게이"로 그 뜻은 "덮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단순한 인내가 아니 라 감싸주고 덮어주며 보호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 때문에 현대 헬라어에서는 이 "스테게이"라는 말이 지붕을 가리키는 말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그만큼 크기때문입니다. 이 사랑 앞에서는 어떠한 비판이나 시비도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사랑은 그보다 훨씬 큰 것으로 전체를 덮어 주며, 그리고 침묵합니다.

 지난번 어버이날 때 교회지하샐에서 점심식사를 하는데 유초등부 멸어린이들이 옆에서 같이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아이에게 제가 "너 엄마 아 빠 꼴달아 드렸니 그랬더니 아니요 달아드릴려고 여기 만들어 놨어요 하면서 종 이를 오려서 만든 꽃을 보여줍디다 그래서 그래 거 참 이쁘게 만들었구나 네가 만들었니 하고 물었더니 그렇데요 그런데 그옆에 있던 어린이가 대뜸 "아니예 요" 저 꽃 선생님이 만들어 주셨데요 그러는 거예요 그랬더니 꽃가지고 있던 어 린이가 어쩔줄을 모르면서 아니야 선생님은 동그라미만 만들어 주셨고 내가 붙였 어 그러면서 울먹울먹 합디다.

 사랑은 모든것을 믿습니다.

또한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사람에게는 그 처세하는 관계성에 있어서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가 속기를 잘하는 사람으로 이 는 누구의 말이든지 쉬이 믿고 따르다가 바보처럼 속아 손해만 보고는 합니다.

그런가 하면 냉소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그 누가 말하더라도 듣 거나 믿지를 아니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똑똑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사실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유형은 현명한 사람입니다. 이 는 자신이 다 알고 있으면서도 믿어주는 사람입니다. 저를 사랑하기에 믿는 것 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믿는다는 것이 이런것입니다. 즉 이웃에게 속는 줄 알면서도 그에 대한 궁극적 신뢰의 자세를 포기하지 않는것입니다. !

왜 그를 사랑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예컨대 어머니의 사랑같은 것입니다.

집을 뛰쳐나간 탕자를 둔 어머니에게 이웃과 친척들도 "이제는 그만 죽은 자식으 로 알고 귀향에 대한 기다림을 포기하라"고 종용하는데 어머니는 "그 애는 반드 시 돌아올 거예요" 라고 말합니다. 이 어머니의 믿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까요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혹은 이 사랑은 불신자 남편을 두고 그를 위해 불철주야 기도하는 아내의 사랑같 은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그 남편이 믿음을 가질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 나 아내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 "그이는 반드시 믿을 거예요 ! " 이 아내의 믿음을 당신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 믿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여기에서의 "믿음" 운 "최악의 상황속에서도 상대방의 최선 을 믿는 것 " 입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 인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의 태도를 예수님에게 배워야 합니다.

연약하고 불안정하고 미숙하기만 한 시몬-그를 처음 만났을 때 주가 주신 말씀 은 무엇이었습니까-" 네 이름을 게바(베드로 = 반석) 하리라 베드로에게 이 반석 (이 육중하고 안정된 견고함의 이미지를 지닌 바위) 의 별명 이 어울릴까요 이것은 인간 시몬에 대한 베드로에로의 기대요 믿음이었던 것입 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사랑으로 인해 그는 초대 교회의 반석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도 상대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의 여인-그녀를 붙들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 나눈 뜨겁고 진지한 영생의 대화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이 부도덕한 버림받은 여인의 내부에서 사마리아 온 동네를 주께로 이끌고 올 선교사의 이상 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 이 믿음이 사마리아에 복음의 새 로운 계절을 가져왔습니다.

 사랑은 모든것을 바랍니다.

이것은 모든것을 소망스럽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모든 것을 소망하고 바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단순한 희망을 가지는 것이 아닌 것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을 사랑하는자 곧 그 뜻데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안에서 바랍니다. 모든것을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스런 환경은 소망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롬5장:3-4 에서 탁월하게 설명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믿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환난중에서도 즐거워합니다. 왜 오늘의 환 난이 내일의 소망을 이룰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것을 견딥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라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동시에 희망의 사람들이 었습니다. 무엇보다 사랑의 사람들이었습니다. " ....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 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이들은 희롱 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 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국에 유리하 였느니라" (히11:35-38_ 무엇때문에 그랬을까요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닐까요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랑보다 더 강력하고 사랑보 다 더 적극적이며 사랑보다 더 낙관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 은 환난과 고통의 역사 속에서도 가장 낙관적으로 세상의 파도를 싸워나갈 수 있 습니다.

 여러분! 이 보든 것을 견디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과 더불어 삽시다. 그 사랑속에 거합 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합시다. 199

2.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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