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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이 없으면 (고전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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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에 2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세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말세의 특징 중의 하나가 악이 창궐하면서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12절).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식어진다"는 동사는 멸종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진정한 사랑 즉 희생적인 사랑(아가페의 사랑)이 사라져 가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돌아가는 국제 정세를 보면 모두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만 혈안이 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국내적으로도 지역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남들이야 어떻든지 자기들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사조가 전체를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정세를 보면서 우리는 이기심을 더욱 배우게 됩니다. 결국 그 이기심은 사회의 혼란을 가져오고 악을 창출해 낼 뿐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흐뭇하고 인정이 넘치는 이야기를 찾아내기는 어렵고 우울하고 답답한 소식만이 전해질 뿐입니다. 사랑이 멸종되어 갈 위기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더욱 안 좋은 것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무감각해질 뿐 아니라 모든 일에 무관심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집에 사는 이웃을 알아보지 못하여 도둑으로 오인한 사실이나, 사람이 옆에서 죽어 가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실들이 바로 이 사회의 무관심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사랑의 온상이 되어야 하는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지만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옆의 사람이 누구인지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고, 누가 아프다 해도 누가 죽었다고 해도 그냥 무심히 듣고 흘려 버리고 마는 오늘의 교회도 무관심의 병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멸종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위기 의식을 가지면서 우리는 사랑을 회복하는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심각하게 병들어 있는 사회와 세계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깊이 깨달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몇 주에 걸쳐 이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생각하려 할 때 고린도전서 13장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사랑의 찬가 가운데 이보다 더 훌륭한 글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찬가를 살펴보면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1-3절, 4-7절, 8-13절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반드시 필요함을 말하였고, 둘째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보통 인간의 본능적인 행위와 다름을 보여주었으며, 끝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은사보다도 크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분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세가지 들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성령의 은사가 아무 소용이 없다.
2)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영적인 능력이 온전치 못하다.
3)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남을 위한 희생이 쓸모가 없다.
우리는 오늘 이 세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 사랑이 없는 은사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성령의 은사 문제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방언의 문제로 교회가 시끄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은사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모든 은사는 오직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만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고전14:26). 바울은 여기서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성령의 은사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오히려 해로운 것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결코 성령의 은사를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은사들이 다 교회를 세우는데 필요하지만 더 필요한 은사가 있고 덜 필요한 은사가 있음을 말하면서 은사의 서열에서 항상 방언의 은사는 맨 마지막에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방언의 은사보다는 다른 은사들이 더 필요하고 더 사모하여야 할 것임을 암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을 여러 은사 가운데 하나로 포함시키지 아니하고 구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지 은사는 아닙니다. 은사는 선택적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은 지식의 말씀을, 어떤 사람은 신유의 은사를 받습니다. 신유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믿음이 부족하다거나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믿는 사람이 함께 받아야 할 필수적인 덕목입니다. 방언을 하지 못해도 상관이 없지만 사랑을 알지 못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기가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은 없어도 상관이 없지만,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성령의 은사들이 사랑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성령의 은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이 없는 방언이나 천사의 말은 오히려 소리나는 구리나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기쁨과 소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불쾌감을 안겨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고통을 주며 무거운 짐이 되게 하는 성령의 은사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가 우선이 아니라 사랑이 우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구하여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주어진 은사를 따라 봉사할 때에도 거기에 사랑이 항상 동반되지 않으면 그 봉사가 오히려 짐이 되고 문제가 되며 결국은 교회에 누를 끼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우리가 지난해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느냐 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더 풍성해졌느냐를 결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수적으로 얼마가 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사랑이 풍성했느냐 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메마른 세상에서 수없이 많은 마음의 상처를 받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상처받은 마음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위안과 평화를 맛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내가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 사랑이 없는 영적 능력

두번째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사랑이 없는 영적 능력"에 대해서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예언하는 능력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탁월한 예언의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안다는 가정을 들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예언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최고의 예언자를 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예언의 능력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도 바울도 결코 예언의 능력을 과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통찰할 수 있는 예언적 기질이야말로 이 시대를 올바로 판단하고 불의와 타협치 아니하며 이 시대에 실현되어야 할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능력입니다.
교회의 역할에 있어서도 이 예언자적 사명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바로 이 예언자적인 사명을 올바로 감당치 아니하므로 인해서 무기력한 교회로 낙인찍혀 온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가 악으로 치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는 대신 불의한 정치에 의해 저질러지는 온갖 억압과 부조리들에 대해 외면하므로 예언자적 사명을 포기하여 왔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역사를 통찰하는 능력이 없으므로 해서 이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할 때도 많았습니다.
이와 같은 한국 교회에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예언의 능력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일부 교회들이 우리의 어려웠던 정치적 상황 아래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목사나 많은 젊은 기독 청년들이 감옥살이를 했고 이 나라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투쟁한 결과로 많은 결실을 거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사랑이 결여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는 가르쳐 주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에게서 가차없는 하나님의 심판과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듣지만 동시에 심판 받을 민족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또한 그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나 예레미야같은 예언자들에게서 진정한 예언자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언자가 되는 첫째 조건도 사랑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인데 그 예언자에게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할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런 예언자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는 예언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보여주는 믿음의 소유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는 항상 이런 기적의 역사들이 언제나 동반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가끔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분명히 기적은 일어나고 그 기적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상 기독교의 모든 역사는 기적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 선교의 역사를 보더라도 이것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60년대 이후 한국 교회들은 급성장하기 시작하여 많은 대형 교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대형 교회들의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적극적 사고입니다. 다시 말해서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그들은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적들 속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사랑은 반비례하여 점점 더 식어 간 것입니다. 천만을 헤아리는 교인들이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 속에 사랑이 증가했다는 증거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만을 목표로 하면 대형화 될수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목표는 결코 기적적인 성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미국 교회의 부흥-수양관을 짓고 묘지를 사고 시설을 확충하는데 심혈을 기울임-오늘날 쇠퇴일로에 있슴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며 그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데 보다 우선적인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고쳐 주셨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도 예수님은 그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신 그의 사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동반하지 않는 기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보다는 인간의 욕망을 들어내며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기적은 인간의 교만을 키워 줄 뿐입니다. 예언이나 기적이 중요하지만 그 역시 사랑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III. 사랑이 없는 희생

끝으로 생각할 것은 사랑이 없는 희생에 대해서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최상급의 박애(博愛)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사랑과 아주 가까운 행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남을 구제한다는 것은 우리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구제와 사랑을 구별하여 쓰고 있습니다. 구제가 곧 사랑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어도 구제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남에게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이 구제에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랑이 없으면서도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구제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수재 의연금이나 불우 이웃돕기를 할 때 보면 신문에 큼직하게 나는 이름들을 우리는 보아 왔습니다. 그 사람들이 사랑이 넘쳐서 거액의 기부금을 낸 것일까요 우리가 아는 대로 대부분의 기업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성금을 내고 있지 않습니까 정부에게 혹은 국민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싫어도 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남에게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지 않고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주는 일을 멈추지는 마십시오. 주는 일을 통해 사랑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일 즉 자기 희생을 기꺼이 할 수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예를 우리는 구약에서 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고, 제비가 뽑히자 말하기를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 배에 탄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참으로 희생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자기가 이 풍랑의 때에 여기서 죽으면 그 배에 탄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참으로 희생적이고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사람이라는 쪽이 훨씬 명예로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의 그런 희생을 값진 것으로 받아 주시지 않았습니다. 죠지 버나드 쇼우는 "순교는 한 인간이 아무 능력 없이 유명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비꼬아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순교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죽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희생은 또 하나의 사랑의 종속물이며 사랑에서 나오지 않은 생명의 희생은 생명의 낭비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희생의 제물이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린도전서 13장 첫 부분에 나열된 덕목들은 우리에게 모두 있어야 할 것들입니다. 성령의 은사나 예언의 능력이나 기적을 행하는 믿음 그리고 구제나 희생-이 모두가 우리 신앙생활의 중요한 덕목들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우선적인 것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은사도 예언도 기적도 구제도 희생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 모두가 필요합니다. 은사와 예언과 기적과 구제와 희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을 먼저 갖추지 않으면 공든 탑이 다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금년에 우리가 정한 주제인 희년을 오게 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의 삶을 위해 기도하시며 노력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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