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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기차를 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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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살고 있는 나는 경부선 열차를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목적지까지 모시고 갈 기관사입니다.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이 되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는 목소리도 '여러분, 우리 기차는 곧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하는 안내방송도 정겹게 들린다.
'우리' 라는 단어의 여운이 문득 모국에 대한 그리움을 자아내는 그 순간을 사랑한다. 기차를 타면 우리나라의 사계절을 뚜렷이 보고 느낄 수 있어 좋다.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과 복사꽃이 가득한 산과 들을 바라보며 분홍빛 마음이 되고, 여름에는 하얗게 피어나는 아카시아와 태산목, 탱자꽃과 밤꽃 향기를 먼데서도 가까이 차창 안으로 불러들인다.
가을에는 불타는 단풍 숲과 벼이삭이 물결치는 황금빛 들녘에 황홀해하고. 겨울에는 눈 덮인 산천과 침묵의 강을 바라보며 마음이 깨끗해진다.
'난 누가 뭐래도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가 제일 좋아.'
혼자서 중얼거리며 창 밖을 보면 산과 들이 '그래 그래'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만 같다. 기차를 타면 생각할 시간이 많아서 좋다. 요즘은 여기저기서 울리는 휴대전화가 고요한 분위기를 깨뜨릴 때가 많지만 그래도 애써 인내하며 눈을 감고 혼자만의 '생각 여행'을 떠나보는 즐거움이 있다.
이런저런 은혜로웠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감사의 짧은 기도를 바치고, 잘못한 행동에 대해서는 좀더 깊이 반성하는 시간도 갖는다. 한참 잊고 있던 옛 일들이 문득 생각나 감회에 젖어보기도 하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살펴보는 지혜로운 판관이 되기도 한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며 메모를 하고, 그 동안 마음 깊이 담아두기만 했던 시상을 불러내어 종이에 옮겨 적는 여유도 가져본다. 기차를 타면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듣고 배울 수 있어 좋다.
옆자리의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네기가 처음에는 어색하고 힘들었으나 요즘은 '어디까지 가세요?' 하고 늘 내가 먼저 자연스레 말을 건네곤 한다. '사실은 어려워서 어쩌나 했는데 먼저 말을 건에시니 편해요. 커피 한 잔 드시겠어요?' 하는 이웃의 모습은 내가 예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정답게 여겨진다.
자기가 지금껏 성장해온 과정, 가족관계, 여러 종류의 고민과 갈등을 비밀스런 부분까지 스스럼없이 나에게 털어놓으며 기도를 청하는 이들의 솔직하고 순박한 모습에서 감동과 자극을 받는다.
때로는 다른 좌석의 사람들까지 찾아와서 기차 안의 환자를 위한 기도를 부탁할 적에는 내가 아직 기도의 전문가가 아닌 사실을 못내 부끄러워하며 가만히 손만 잡아주고 온다. 서로 이름과 주소를 주고받으며 다음 만남을 약속하는 경우도 없진 않으나 대개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니 서로에게 편안하고 부담이 없다.
차에서 내릴 적에 나의 짐을 들어주는 사람들 중에는 내가 광안리에 있는 수녀원에 산다니까
'저는 평소에 이해인 수녀님의 글을 좋아해서 그분께 편지까지 쓴 일도 있답니다.' 하며 설마 당사자인 줄은 모른 채 내 앞에서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들도 더러 있다. 기차를 타면 욕심을 버린 작은 순례자의 마음이 된다.
'안녕히 가세요 !' '잘 다녀오세요 !' 하는 인사말을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곳. 우리의 삶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임을 더욱 실감나게 하는 곳. 기적 소리를 울리며 달리는 기차와 함께 내 마음도 끝없이 달려가는 시간. 여행이 주는 한 줌의 쓸쓸함을 즐겁게 맛들이는 시간.
작은 순례자인 나는 내 마음을 향해 나직이 속삭여 본다.
'마음이여, 좀더 단순하고 가벼워져라.'
'마음이여, 좀더 겸손하고 자유로워져라.'
'인생이라는 기차 안에서 완전히 내리기 전에 먼저 용서하고 화해하는 연습을 부지런히 하여라.'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지.
사랑을 하고 싶으면 기차를 타라고 나는 말해야겠네.
혼자만의 기차여행도 아름답지만 가까운 벗이 옆에 있는 여정 또한 즐거우리라.
우리 함께 기차를 타요
도시락 대신 사랑 하나 싸들고
나란히 앉아 창 밖을 바라보며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서 길어지는
또 하나의 기차가 되어 먼길을 가요
<이해인, '기차를 타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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