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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의 하나님 (롬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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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이 살아가는데 소망은 필수 적입니다.
몇 해 전에 한국일보사가 화재로 인하여 큰 손해를 보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창업주인 고인이 된 장기영씨가 한 말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사람에게서 재물을 잃는다는 것은 큰 손실이다. 그리고 사람을 잃는 것은 더 큰 손실이다. 그러나 희망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다."라고......
사람이 살아갈 때 끝까지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소망입니다.
이번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매몰된 후 구출을 받은 사람들은 극한 상황 속에서도 삶의 소망을 잃지 않고 있었기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잿더미 위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소망이 있으면 그는 다시 일어나겠지만, 폐허화된 잿더미에서 소망이 없다고 한다면 영원히 일어설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도 보면 우리에게 세 가지가 항상 있어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할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도 <소망>이 항상 있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평생을 사노라면, 여러 번 믿었던 줄이 끊어지는 경우를 당합니다.
한 백년 같이 살자던 사랑하는 아내가, 또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성업 중이던 사업이 졸지에 실패를 당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믿었던 줄이 끊어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서도 소망의 줄 하나만 끊어지지 않으면 모든 것을 극복하고 다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소망은 영혼의 닻이라'고 했습니다.
닻이 없는 배는 풍랑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결구 파선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소망이 없으면, 우리 영혼은 길을 잃고, 방황하고 낙심하다가, 죄의 바다에서 파선되고 맙니다. 오늘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보십시오. 저들이 왜 귀한 목숨을 스스로 끊으려고 하겠습니까 소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보면, <소망 중에 사는 사람> 보다는 점점 낙심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분명히 예전에 사람들이 보지도 못하고 가지지도 못했던 과학 물질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살건만 왜들 그렇게 소망 중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근심과 걱정 중에 사는 사람들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아는 사람을 만나서 잘되어 가십니까" 라고 하면, "뭐 불경기입니다." "장사도 통 안되고 우리 같은 중소기업들은 모두 문 닫게 되었습니다" 라고......
"잘됩니다", "신납니다" "요즘 정말 살맛 납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분명히 지난날에 비교하면 월급들도 올랐고, 가전제품들을 다 들여놓고, 전화, 텔레비전,냉장고, 세탁기 등등....옛날에는 세종대왕도 가지지 못했던 것들을 다 가지고 살면서도 살맛이 안 난다니....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진정 소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소망을 어디에다 세워 놓았는가 하는데 있습니다.

2. 소망의 기초를 어디에 두어야 하겠는가 입니다.
소망의 기초가 튼튼해야 낙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면 대부분 자신의 능력을 믿고 거기에다 소망을 둡니다. 자기의 머리만 믿고 산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재물에다 모든 소망의 근거를 두고 삽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자신의 건강에다 소망의 근거를 삼으려고 합니다.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 소망의 근거를 하나씩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모두가 보이는 세계의 것들입니다.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너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소망의 근거를 그런 것들 위에 세워 놓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들은 먼저 하나님 다음에 오는 부산물들이 되어야지, 그것이 목적이 될 때, 언제나 낙심이요, 절망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도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도 "나의 소망이 오직 주께 있나이다"라고 했고,
시편 62:5절에는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오직 저만 나의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만 나의 소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낙심하는 이유들을 보면, 모두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에다 소망을 두고, 재물에다 소망의 근거를 삼고, 자기의 능력에다 미래를 걸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무너질 때 소망도 무너진다는 말씀입니다.
낙심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하나님을 제일 마지막에 갔다 놓고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실패했어야 하나님 찾고, 병들었어야 하나님 불렀지 그렇지 아니했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왔겠는가 한번쯤 자기를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6.25때 소망의 근거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절감했던 사람들입니다. 재물과 땅과 집에다 소망을 두고 살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피난의 대열에서 느꼈던 그때의 심정이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나의 소망이 주께 있나이다]라고 했던 우리들이 아닙니까
어떤 목사님의 간증에, 어떤 이가 북한 돈을 배낭으로 하나 가득히 지고 나오다가 임진강 나루터에서 모두 불태워 버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세상에서 사람들이 그렇게도 사모하는 것들이 저렇게 불타는 허무한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일찍이 느껴 보았답니다.
여러분! 유명한 중세 교회의 어거스틴의 저서인 [하나님의 나라] [신의 도성] [City of God]이라는 책을 읽어보게 되면, 거기에서 로마의 화려하던 지상 권세의 극치였던 나라가 불타는 것을 보면서 한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영적 눈으로 바라보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는데 우리도 영원한 나라를 바라볼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될 줄로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있는 것들은 다 불타 버리게 되는 하찮은 것들입니다. 거기에다 소망의 근거를 둘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3. 그러면 하나님이 왜 소망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까 그의 영원성(eternity) 때문입니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세월과 함께 변하고, 시간과 함께 끝나는 것들이라면, 모두가 실망을 줄 것들이지만,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건강도, 지식도, 명예도, 재물도, 권세도, 인기도, 다 시간과 함께 변하는 것들입니다. 심지어 산천도 세월과 함께 변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 것에다 소망의 근거를 두었다면, 그런 것과 함께 절망할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 이전에 계셨고, 역사 안에 활동하시며, 역사의 심판자로서 인류의 종말을 지켜보시는 분이기에 그에게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박해와 핍박 속에서 순교자들의 피로 이어져 왔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없어진 것 같이 보였지만, 그렇게 모진 핍박 속에서도 면면이 이어온 것은, 소망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소망이 오직 저로 좇아 나는 도다'라는 신앙의 고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이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 생활 중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루 세 번씩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로 살았고, 초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독재 폭군들 밑에서 300여년간 지하 무덤에서 살면서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을 소망의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유물주의 공산 당의 괴수, 동족살육의 전범자 김일성이 일으킨 6.25도 어언 45년의 세월이 흘러갔고, 그도 죽어 땅속에 들어갔습니다. 결국 모든 독재자들이 그러했듯이 그 뒤를 이어 올 자들도 세월과 함께 묻어질 것들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소망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임으로 모든 역사의 시작과 종말을 지켜보시고 계십니다. 제아무리 독재자들이라도 때가 차면 기울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도 "주여! 주는 우리의 대대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 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소망의 기초를 하나님께 두는 것은 그의 불변성(不變性)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변합니다. 사람의 굳은 약속은 세월과 함께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믿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사랑 받을 만한 공로들을 세워서가 아니라, 그의 편에서 먼저 사랑하고 그 사랑이 변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일 우리가 하는 것만큼 우리를 사랑하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벌써 몇 번씩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불변하신 약속이기에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43:1절에 "내가 너를 이름지어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라. 그런고로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나갈지라도 물이 너를 빠지게 못할 것이고,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나갈지라도 불이 너를 사르지 못하리라.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같이 할 것이니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네 하나님이 되리라"고....
이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하셨고, 또 신실하게 지키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언약의 산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자들에게는 벌써 영생을 주셨고,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로 삼아 주셨습니다.
여러분! 육신의 자식도 한번 낳은 후에는 그 자식이 잘났어도 자식이요, 못났어도 자식이지, 자식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말을 안 들으면, '너 실컷 해 봐라'고 할 수는 있으나, 그 아들로 인하여 잠이 오지 않는 것이 부모들인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그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망의 줄이 다 끊어진다 해도, 마지막 숨결이 높아질 때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허랑 방탕 자기의 분깃을 다 탕진하고 돌아오는 탕자를 보고, 달려가 목을 않고 입을 맞추고, 새옷으로 가라 입히고, 금가락지를 끼우고,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비유입니다.그러므로 죄인의 마지막 소망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깨달은 자만이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꼬 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여러분! 그러기에 오늘 하나님 앞에서 제일 큰 죄는 무엇입니까 소망의 하나님을 부인하고, 절망하고, 낙심하는 것이 죄입니다. 절망은 곧 죄입니다.
속을 썩이든 자식이라도, 마음잡아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에 허물을 다 기억지 않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라면,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큰 불효가 무엇이겠습니까 다 큰 것이 부모 앞에서 도무지 살 소망이 없다고 절망하여 자살이나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제일 부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괘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도 이렇게 믿는다는 사람들이 못살겠다고 불평이나 하고, 죽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제일 큰 죄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결코 낙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 되새겨 보아야 하겠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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