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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훼가 나의 목자시니(1) (시 23:1-6)

첨부 1


본문 사역의 해설과 구절풀이

1. 시23편은 `다윗의 노래'[미츠모르 레다비드] 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다윗의 시'(개역), `다윗의 노래'(표준새번역)로 되어있다. `다윗의 노래'란 표현에서 `노래'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우리는 확실히 모른다. 시편에는 모두 25개의 제목이 나온다. 그러나 그 제목들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우리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히브리어에서 `노래'는 흔히 [쉬르]란 말로 불리운다. 오늘 본문 제목에 들어있는 `노래'는 [쉬르]가 아닌 [미츠모르]이다. [쉬르]가 `예배음악/찬송'을 나타낸다면, [미츠모르]는 일상생활에서 부르는 노래나 찬양을 가리킨다고 구분할 수 있다. [미츠모르]가 제목으로 나오는 경우는 57번, 거기에 `다윗의' [레다비드]란 말이 첨부된 경우는 모두 35회 나타난다. 때론 [미츠모르]가 [쉬르]란 말과 함께 표제어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시30; 48; 65; 67; 68; 75; 76; 83; 87; 92; 108).

시편의 표제는 외형상 다윗을 저자로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히브리어 전치사 [라메드] 에 대한 문학비평적 고찰은 이 시편의 표제가 저자보다는 `시가의 결집이나 작품의 한 묶음'을 지칭하는 구실을 감당하고 있음을 밝혀주었다. '다윗의 노래'란 표제는 이 시가 다윗의 이름 아래 수집되어 있는 편집상의 추가 장치라는 말이다.

나는 부족함이 없다 [에흐사르] 하세르 동사의 단순 미완료 시제 1인칭으로 `감소하다'diminish, `부족하다'become less 라는 뜻을 가진다. 여기에서는 '…없이 때우다' do without 라는 뜻을 가진다 (비교, 신2:7). 이 동사는 문장 속에서 보통 목적어와 함께 쓰여야 자연스럽다. 예를 들어 `물이 줄다' (창8:3, 5)와 같은 표현이 그것이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아무 목적어 없이 단독으로 사용된다. 무엇이 부족하지 않은지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문맥상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으나, 그만큼 함축적이다. 본문에서 `나는 부족함이 없다'는 동사는 그 앞에 있는 명사구문, "야훼는 나의 목자" 라는 선언에 따른 결과이다 (창2:17 ; 시15:5 ; 26:1:27:1). '야훼가 나의 목자시니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라는 번역은 이런 관계성 파악에 근거한다.

2. 푸른 풀밭에 그가 나를 누이신다[빈오트 데셰 아르비체니]. 우리 말 표현으로는 '그가 나를 풀밭에 누이시며'이다. 하지만 히브리어 구문은 `푸른 풀밭에'[빈오트 데셰]란 말을 강조하여 문장 맨 앞에 놓고 있다. 여기에 뒤따르는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십니다'도 직역하면 `잔잔한 물가로 그가 나를 인도하십니다'가 된다. 동사의 주어(`그가')와 목적격 인칭어미(`나를')가 히브리어 문장에서는 계속 반복되고 있다. 필자의 시23편 번역은 가능한 한 히브리어 구문을 살리는 쪽을 택한다. 하지만 한 문장 속에 거듭 반복되는 히브리어 동사의 주격과 목적격은 우리 말 표현의 매끄러움을 살리기 위해서 생략한다. 번역에는 항상 오역(誤譯)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원문의 낱말과 구문을 직역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원문의 뜻이 전달되지 않는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원문의 뜻은 원문에 가깝게 옮겨졌지만 원문의 일부를 삭제, 첨가, 변경함으로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필자는 원문의 구조를 할 수만 있으면 살리면서도 원문의 뜻이 우리 말로 전달되는 번역을 추구하려고 한다.

푸른 풀밭[네오트 데셰] . `풀이 많은 목장'을 가리킨다. `비 온 후에 돋은 새 풀'이란 뜻의 말[데셰]과 `목장'([나바])이란 말의 연결이 이런 번역을 가능케 한다. '목장'이란 말은 다른 곳에서는 `거주, 주거'란 의미로도 쓰인다 (욥8:6).

그가 나를 누이신다. 헬라어 본문에서는 `그곳에 그가 나를 거주하게 하신다' [에이스 토폰 크로에스, 에케이 카테스케노센] eivj to,pon clo,hj, evkei/ ka-teskh,nwsen)로 되어있다. 헬라어 구약성서의 본문 수정은 크게 보아 번역의 대본(vorlage) 탓일 수도 있고, 헬라어 번역자의 번역 원칙에 기인한 결과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문맥을 따라, 또는 신학적인 이유로 히브리어 본문과는 차이가 있는 본문이 생겨나게 된다.

`그가 나를 누이신다'[야르비체니]는 히브리어 '눕다'란 동사[라바츠]의 사역형이다. 이 말은 주로 짐승들이 편안히 (또는 지쳐서) 땅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가리킨다(출23:5 ; 민22:27 ; 창49:9, 14 ; 창29:2). 하나님을 목자로, 시인을 양으로 비유하는 현상이 이 단어에서 나타나고 있다. 헬라어 본문을 따라 이 귀절을 '그곳에 그가 나를 거주하게 하신다'로 읽을 경우 2절 전반절은 6절 후반절 (1그러니 야훼의 집에서 나는 살으렵니다')의 시적 대구(對句) 구실을 하게 된다.

잔잔한 물가 [메이 메누호트]. `잔잔함'[메누호트]은 `여행 중에 쉬는 곳'이거나 '쉼의 상태'를 의미한다. 전자는 거주할 수 있는 공간 resting-place 이란 의미이고 (예, 사32:18), 후자는 평안한 상태 rest, quietness 를 나타낸다. 직역하면 '물의 쉼'이다. 곧 '잔잔한 물'을 가리킨다.

3. (내 영혼을) 그가 새롭게 하시고[예쉬베브]. `새롭게 하시고'란 표현은 `되돌아오게 하다'란 말에서 비롯되었다. 이 표현은 '돌아오다'([슈브])란 동사의 폴렐형(강세형) 미완료 시제이다. 본문에서는 이 말이 은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행로[마갈]. 이 히브리어는 단순히 `길'로 번역되기에는 너무 좁은 길이다. 이 길은 많은 사람이 밟고 다녀서 생긴 통로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밟고 다녀서 생긴 길은 히브리어로 [데렉]이라고 부른다. 본문은 이런 길이 아니다. 본문의 [마갈]은 일종의 트랙 track 이다. `의의 행로'는 아무나 막 가는 길이 아니다. 그곳은 좁은 길이기 때문이다.

4.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짤마베트]. [짤마베트]란 말은 `그림자' [젤]란 단어와 `죽음'[마베트]이란 단어의 합성어로 여겨진다. `죽음의 그림자,' 또는 '깊은 계곡'이란 번역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이 단어는 종종 `흑암'[호세크]과 `밤'[라옐라]의 동의어로, 반면 `빛'[오르], `아침' [보케르]의 반의어로 사용된다.

당신의 지팡이와 당신의 막대기-그들이 내게 힘을 줍니다 [쉐브테카 우미쉬안테카, 헴마 예나하무니].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의 구문은 `당신의 지팡이'와 `당신의 막대기'에서 일단 정지한다. 절의 끊어 읽기 (또는 분절)을 나타내는 악센트 중의 하나인 [레비아 마그눔] Rebia magnum 이 여기에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나서 본문은 3인칭복수지시대명사[헴마]+ 동사[예나하무니]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번역은 관례를 따라 이 지시/인칭대명사의 역할을 번역에서 강조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히브리어 구문을 살리는 번역은 당신의 지팡이와 당신의 막대기-그들이 내게 힘을 줍니다'가 되어야 한다. `내게 힘을 줍니다' [예나하무니]라는 술어는 [나함]동사의 피엘 미완료형 3인칭 남성 복수에 1인칭 단수 인칭어미가 붙어있는 형태이다. 직역하면 `그들이(그것들이) 나를 위로해줍니다'이다. 코흐 K. Koch 는 모르겐스턴 J.Morgenstern 의 제안을 따라 이 구절에서 이 단어의 의미가 '위로하다' (to comfort)가 될 수 없다고 본다. 필자는 모르켄스턴, 코흐를 따라 '그들이(그것들이) 내게 힘을 줍니다' (they reassure me)로 읽는다.

5. 당신이 (내 앞에 상을) 차려 주십니다 . 원형 의 뜻은 '줄지어 놓다', '층으로 쌍아 올리다,' `층으로 쌓아 올리다,' '순서대로 놓다,' `정렬하다'이다. 이 말은 단순히 준비하는 행위를 일컫지 않는다. 이 말에는 무엇인가를 순서대로 진열하거나, 순서대로 준비하는 동작이 내포되어 있다. `상을 차려 주시고'란 우리 말 표현은 이 단어의 의미를 살리기에 아주 적합하다.

`상'[술한] 은 `접시가 놓인 식탁'을 의미한다. 이 상은 특히 왕을 위해 차려진 식탁을 지칭한다 (왕상5:7). 제의적 용법에서는 제사상 sacrificial table 을 가리킨다 (출25:23 ; 겔40:39). 대부분의 히브리어 사전은 히브리어 [술한]을 아랍어 [살라하] ('가죽을 벗기다')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이 단어가 '식사를 위해 땅에 놓인 짐승의 가죽'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히브리어의 어근을 다후드 M.Dahood 를 따라 생각해보면 우가릿어 [탈한] (`상')에서 비롯된 말이다. 아마도 다후드의 설명이 더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왜 시인의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 주신다'고 말하게 된 걸까 `상'이란 단어의 뜻이 애매하다고 여겨서인지 이것을 히브리어 본문의 비평적 각주는 [셰라흐]동사의 `실수로 인한 중복문자' dittography 로 간주하라고 제안한다. 그럴 경우 `상'은 `창', `화살'이 된다. 즉 5절의 시작은 `창이나 화살을 정렬하다' [아로크 셰라흐]가 된다. 만약 이런 제안이 정당하다면 본문은 오래 전 파우어 E.Power 가 했던 번역 '당신은 내 앞에서 창을 던질 준비를 하였습니다' You hold the javelin at the ready in front of me 로 읽혀질 수 있다. 본문 4절에 이어 하나님께서 시인을 원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신다는 신념이 이런 수정 제안 속에 담겨 있다. 하지만 코흐의 지적처럼 이런 제안은 지나친 본문 수정이다. 본문 속에 주석자의 생각을 첨부하여 본문의 흐름을 이해하려는 시도에 빠질 수 있다. 본문의 히브리어는 분명 `상'[술한]이다. 시 속에 각인된 소재가 움직임(이동)에서 거주함(집에 거함)으로 옮겨지고 있다. 바깥 벌판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인도가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가고 있다. '밥상'이란 소재의 등장은 이런 시의 흐름과 잘 어울린다. 시인이 하나님의 집의 식객으로 초대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새 힘을 주십니다. 여기 동사 `새 힘을 주십니다'는 히브리어 [다셴]의 우리 말 번역이다. [다셴]은 단순형에서는 `살찌다' become fat , 강조형에서는 '소생시키다' revive , `기름 재를 제거하여 깨끗케 하다' clean something of fatty ashes 의 의미를 지닌다. 이 동사는 단순히 '기름을 붓다'는 뜻의 말이 아니다. 본문에서는 `소생시키다'의 의미로 활용되고 있다. 본문 5절의 전반절과 후반절 사이에는 단어의 의미의 대구가 있다. `(내 앞에 차려진) 상'과 '(그 상에 놓인) 내 잔'이 단어 상의 평행이라면, `음식을 먹음으로 새 힘을 차리게 될 것' (전반절)과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새 힘을 얻게 될 것' (후반절)은 의미상의 평행이다. 여기에서 우리 말 표준새번역 성서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어 /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주시니 / 내 잔이 넘칩니다')는 개역성서 본문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의 애매한 의미를 수정하는 데 공헌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주시니'란 구절이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에는 없다는 점이다. [다셴]이란 동사의 의미 파악은 이런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준다. [다셴]이란 말은 단순히 기름을 붓는 행위를 뜻하지 않는다. 그 말 속에는 정녕 '소생시키다'라는 의미가 들어있다.6. 선하심과 인자하심[토브 봐헤세드]히브리 본문은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아니다. 그냥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신을 시중드는 두 시종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구약성서에서도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이다 (비교. 시25:21 ; 37:37 ;43:3 ; 89:15:합3:5). 다후드는 이런 표현이 히브리어 문장 속에 담겨있는 가나안 신화와 종교 사상이라고 간주한다.

나는 야훼의 집에서 살으렵니다[베샤브티 베베트 야훼].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은 `그리고 나는 돌아오렵니다' ([베샤브티])이다. 이것은 아마도 순례자의 기도, 순례자의 서원에 가깝다. 헬라어역은 '나의 처소는 야훼의 집이 될 것입니다' (kai. to. katoikei/n me evn oi;kw ku-ri,ou)이다. 다은 사본, 역본(페쉬타, 탈굼)들은 '나는 야훼의 집에 살으렵니다' [베야사브티]이 맨 마지막 본문상의 증거가 가장 낳은 읽기라고 여겨진다 (비교. 시17:41). 필자는 이 증거를 따라 `나는 야훼의 집에서 살으렵니다'로 번역한다. 이 구절을 순례자의 맹세로 읽을 경우 (즉, 나는 돌아오렵니다'), 본문은 부당하게 고소 당한 시인이 무죄 판결을 받고 공동체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는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야훼의 집에서 살겠다'로 읽을 경우, 본문은 거룩한 곳에서 피난처를 발견한 한 사람의 확신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경건한 시인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토로하는 영성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의 양식이 찬양서원 vow of praise 이란 점에 유의하자. 여기에서 `하나님의 집'이 감당하는 기능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집을 자신의 거주지로 삼을 수밖에 없다고 토로하는 말의 정황에 대한 이해가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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