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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속 (요 13: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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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장의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은 1절의 말씀과 같이 주 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증거로 이해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저녁 식사 이후에 친히 겉옷을 벗어 놓으시고 수건을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발을 씻기 시는 이 사건을 구약의 성막이나 성전에 있었던 식으로 보자면 제단을 지나 성소를 향하여 가는 중간에 있는 대야에 담긴 물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 죄가 모두 씻음을 받는 목욕과 같은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이후에 우리가 정결하게 유지되는 성결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 서 온 몸을 씻을 필요가 없고 몸을 씻은 자로서 발만 씻으면 된다고 그러신 것입니 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하여 종종 오해가 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의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위한 사역 중에서 가장 큰 일이란 물론 우리를 죄인된 자 리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그 종자가 바뀌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된 이후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완성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완성의 길이 바로 의 와 성결로 거룩해지며, 흠과 점도 없는 완성의 자리로 가도록 간섭하시는 손길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 신자들에게 약속되어 있는 엄청난 계획과 하나님의 손길 이 무엇인지를 추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본문 4절에서 저녁을 잡수시던 예수님께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 에 두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1:23-26절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이 최후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래서 이 씻음은 죽으심 이후의 사역에 대한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의 신앙 분위기와 한국 교회의 현 주소는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데 너무 많이 사로잡혀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아무리 사로 잡혀 있고 강조한다고 해도 부족할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만, 그러한 사고방식이 놀랍게도 신앙의 바로 다 음 단계를 넘어가지 못하도록 치명타를 가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구원에 관한 상징 중에서 가장 멋있게 나타내고 있는 사건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유월절과 홍해를 통과함으로 가나안 땅 으로 이전됩니다. 여기서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으며, 홍 해는 우리의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으로의 거듭남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어디서 어느 때가 가장 기뻤을 것 같습니까 출애굽기 15장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송시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14장의 홍해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홍해를 건넌 사건이 가장 기쁘고 즐거운 때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거듭남 이 그렇게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15장의 홍해를 건넌 기쁨과 찬송 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16장에 이르면 당장 마라 사건이 등장합니다. 얼마 전 만 하더라고 홍해의 구원의 감격에 춤추고 기뻐 찬송했던 그들이 이제 광야의 타는 갈증의 시련 앞에서 원망과 불평이 하늘을 치솟았습니다. 백성들이 모세 앞에서 뭐 라고 원망을 하였는지 아십니까 '그때가 좋았다, 나와 보니 개판이다. 고기 가마 곁에 있었을 때가 좋았다. 그때가 비록 종이었지만 거기는 먹을 것도 풍성했고 살 만했다. 그런데 이게 뭐냐'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홍해를 건넌 기쁨이 광야 내내 지속되었으리라고 생각지 말아야 합 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되었던 곳에서 구속을 받아 자유를 얻은 것이 참으로 기쁘고 자랑스러운 사실로 완전히 경험되는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 어가기 까지는 불가능합니다. 홍해의 잠깐의 기쁨 뒤에 곧 이어서 광야 생활이 우 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신자의 생활에 분명히 장자가 죽는 재난에서 구출함을 받은 유월절 사건이 있었고, 홍해를 기적으로 건넌 체험이 있음 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순간에는 기껏해야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릍지 않은 정도로 만족해야 되는 것이 신자의 대부분의 삶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어떤 생각을 거의 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예수를 제대 로 믿고 영접했으면 죽는 날까지 찬송으로 연결되는 것일 거라는 생각을 많이들 하 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생각이 우리의 신앙 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것입 다. 그래서 예수 믿고 나서 신앙 생활이 어려워 지면 대개 어더ㅎ게 생각하는가하 면 '내가 제대로 믿지 않아서이다. 내가 제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다시 홍해 건너편에 가서 헤엄쳐서 나오는 것을 반복하고 있 습니다.

이미 한국 교회에 구원의 확신의 문제가 등장한 것은 20년쯤 되었습니다. 분명히 필요한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지 않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도 이 감격과 확신에만 집착하다가 그만 광야의 지루 함과 의심과 좌절과 고통의 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미처 예상치 못하는 것입니 다. 그래서 당황해 하며 혼동 속으로 신앙이 전락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지금 막 홍해를 건너서 몸에서 아직도 바닷물이 뚝뚝 떨어지는 사람, 아직도 몸에 게가 붙어 있는 사람, 해삼도 붙어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큰 소리를 칩니다 '아니, 지금 뭐하는 겁니까'하면서 자랑스럽게 간증하고 휘 젓고 다닙니다. 이에 약코 기가 죽은 나는 마치 홍해를 안 건넌 것 같고, 내가 건넜던 것은 무슨 시냇물 이었던 것 같아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난 아닌가 보다'하면서 그 사람을 쫓아가 서 다시 건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홍해를 몇번 건넜느냐 밖에 더 계산 할 것이 없는 신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홍해 다음에 진전되고 펼쳐지는 길이 결 코 조금 전의 감동이나 희열이나 승리와 같은 것이 연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 고 놓쳐 버리는 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자가 광야 세상을 걷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이건 아닌가 보다'하면서 쉽게 생각해 버리는 이유는 신앙이 어떻게 하여 완성되어 가는 것인지 그 신앙의 전과정 에 대한 몰이해 때문입니다. 신앙은 홍해를 건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 출발점에 불과한 것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다 지금 홍해 옆에다 텐트를 치고 거기서 좋은 날들을 보내겠다고 우기는 이상한 신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를 죄악의 종되었던 자리에서 꺼내시는 것만큼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며 새 피조물이 되는 일에 열정과 애정과 인 내를 가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같이, 친히 수건을 두르시고 그들의 발을 씻겨 주고 계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출21:2-6절을 보십시다.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 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며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를 들었으면 그 아 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줌으로 그 아내가 자녀를 낳았으 면 그 아내와 그 자식들을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종 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 기리라"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을 어떻게 부려야 하며, 어떻게 놓아 주어야 하는가 에 관한 사회법입니다만 뜻밖에도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상징 중의 한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별명은 많이 있습니다.왕이라고도 하고, 선지자라고도 하며, 제사 장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이것에다 더 많은 단어를 씁니다. 예수님을 종이라고도 부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집을 섬기기 위하여 선택된 자입니다.

6년 동안을 봉사하고 7년째는 종을 놓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혼자 왔으면 혼자 나가고, 가족으로 왔으면 가족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그 종이 혼자 와서 주인 이 아내를 짝지워 주고 그래서 생긴 가족이라면 못 데리고 나갑니다. 참 이상한 이 야기입니다. 기왕 준 바에야 같이 나가게 하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6년이니 7년이니 하는 것은 기간에 대한 상징이 아 니라, 책임 완수에 관한 상징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우리가 어떤 주인의 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게 종 되었던 것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종 이란 말하자면 돈에 팔려와서 돈에 해당하는 것만큼 일을 해서 돈 가치를 하면 놓 아 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값을 어떤 일로도 값을 재주가 없는 어떤 주인의 노예입니다. 그런데 한 노예가 종으로 필려와서 그 액수만큼 일을 하 고 그 액수만큼 일을 했기 때문에 나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생을 해도 우리 값을 다 갚고 나갈 수 없어서 우리는 그의 종으로 있는 것입니다. 헌데 그 자유하게 된 종이 들어와서 일을 하는 동안 나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자유한 종은 얼 마든지 혼자 갈 수도 있었으나 그 주인을 사랑하고 또 아내와 자식을 사랑해서 영 원히 이 집에 있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가정에서 떠나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종의 신분은 묘해집니다. 말하자면 상속도 받을 수 있는 일종의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갖는 상징성을 추적해 보면 뜻밖의 사건이 되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노예 신분으로서 어떤 처지에 빠져 있는지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롬3:19-20절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 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 말씀에서 분명히 우리는 죄인의 신분으로서 그 죄값을 치르고 갚을 능력이 없 는 자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성경식으로 말해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 다. 그러니까 우리는 종된 신분에서 나갈 수가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 이 종된 신분에서 어떻게 구출을 받느냐 하면, 신랑이 와서 구출해 내는 것입니 다. 즉, 우리의 신분을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내시기 위 해서 먼저 우리가 있는 데로 오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 나셨던 것입니 다. 그리고는 일단 율법의 요구를 다 만족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신랑 으로서 우리와 결혼 하심으로 우리를 구출해 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중의 하나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은 아니었습 다. 마5: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온전케하러 오셨다고 하셧습니다. 요구된 것을 다 이 루시고자 예수님께서 오셨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죄의 노예된 신분으로서 벗어 날 수 없게 되었는데 출애굽기 21장에 나타난 말슴처럼 어떤 능력있는 종이 와서 우리와 결혼을 해서 영원히 이 안에 있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실상 종 의 신분이 아닌 다른 신분으로 변하게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율법만 이루시고 합격을 받으시고 가 버리시기만 하면 우리를 구출해 낼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와 결혼하셔야 됩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식으로 표현하자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 까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혼자 자유하셔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 다. 그 분은 죽음 아래 들어갈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죄가 없으신 자요, 죄 지은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그 분께서 왜 사망 아래로 들어갑 니까 그것은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서이며, 우리와 연합되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 셨던 것입니다. 출 21장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와 결혼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죽어 마땅한 자였습니다. 우리로부터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의 열매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씨앗으로 삼 아서 열매를 맺자 열매는 전부 씨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예 수님과 같은 성품, 같은 본질을 갖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신과 동등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높은 경지인지 우리가 신의 성 품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는 표현을 서슴치 않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적인 유대관 계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굉장한 존재 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로부터가 아니라 그분으로부터입니다. 이것을 다시말하면 예수님의 죽음 속에 자신을 두사 우리와 결합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왜 죽음으 로 나타나야 하느냐 하면 죽음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놓지 않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상전과 내 아내와 자식들을 영원히 섬기겠습니다. 놓 지 않겠습니다.' 이같은 연합이 깨어지지 않는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영원한 종으로 자청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귀를 뚫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종을 자청하시기 위하여 그 스스로 십자가 위에 올라가사 종 의 영원한 상처를 그 손과 옆구리에 남기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참으로 우리에 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롬1:3절에 보면 예쑤님에 대한 이런 표현 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 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시니라" 그는 사망 가운데 있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사망 아래 갖다 놓으면 죽습 니다만 그는 사망 아래 가도 죽지 않습니다. 죽지 않는 분이 왜 거기에 갔습니까 우리는 ㅅ애명이 없는 자라서 땅에 심은면 썩는 자이고, 그는 생명이라서 땅에 심 으면 열매를 맺는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값으로 사망 가운데 있어 마땅한 자 들이지만, 그 분께서 우리와 결합함으로 우리를 사망 가운데서 다시 새피조물로 나 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 를 대속한 장소요,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를 놓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가 영원한 종 으로 자처한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란 너무나 놀라운 자리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것 같습니까 이 대목이 우리에게는 늘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흔들리던 부분이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거의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가 우리를 흑암과 죄에서 구원하셨으니 이제 우리가 무엇을 망설이랴! 나가자, 전하자, 그를 위하여 헌금하자' 이것이 전부 아닙니까 항상 무 슨 궐기 대회만을 열곤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의 가족 관계를 맺으시고, 정말 아름답 고 풍성하게 누리시기 위하여 그 고통과 어려운 일들을 해내셨습니다. 이제 드디어 다 해 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다음에 할 것이 무엇일까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 피흘리면서 몸으로 막고 온갖 희생을 다 치루었다면, 이제 남아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가정을 이루고 이제 마음 놓고 마음껏 사랑하며, 여기 저기 도 함께 가며 행복한 생활을 누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서 거듭난 신자는 이제 2차적인 생활인 신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특권과 삶이 소 개되고 있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새 삶에 대한 준비와 계획 보다, 전부가 너무나 큰 빚을 진 자같이 '어떻게 이 빚을 다 갚나!'걱정만 하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마 치 새로운 채권자를 만난 사람들 같습니다. 또한 그렇다고 하여 항상 처음의 감격 만으로 살려고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돌 아가셨으니 이제는 더 이상 그 분께 요구할 것이 없다.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다 내 책임이다. 그게 무슨 책임이냐 하면 주께서 나에게 해 주실 것을 내가 아직도 믿지 않고 있고 그대로 안 살고 있어서 생긴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 리는 너무 광범위한 것을 한 마디로 갖다 끌어 놓아서 거기에 갈등이 있는 것입니 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처음의 감격이 그 다음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 감격으로 끝까지 가는 에너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 단계에 가면 그 다음에 또 새로운 힘이 있고, 새로운 권면이 있고, 강권하심이 있고, 간섭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걸음이라고 자기 혼자서 걸을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닌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가운데서, 노예 가운데서 꺼내셨을 뿐만 아 니라, 우리의 남편이 되시며 우리의 부형이 되사 지금도 함께 하시며 영원히 함께 하시며 우리를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간섭하시겠다는 약속을 남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신앙의 최고 의 약점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을 믿고 확인 하고 감사하면서도 지금도 주님이 내 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좀 생각이 멉니다.

그것까지는 너무 미안한 요구인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출애굽기식으로 말하자면 친히 그의 귀를 뚫었으며,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손과 발에 못자국을 남기사 친히 우리를 끝까지 간섭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종으로 자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활 후에 도마에게 나타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는 부활하면 그런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괜챦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부활 전과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완성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아직도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계심을 요한계시록5:6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 한 것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보좌 앞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일찍 죽음을 당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상처를 갖고 계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께서는 아직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를 향 하신 그의 계획과 일을 이루시기까지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함께 하시고, 지켜 보 시며, 동행하시는 분으로 있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을 마28장 마지막 부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권세 를 내게 주셨다. 너희는 어디를 가든지 이것을 전해라!'고 하시면서 부언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지니라' 그렇습니다. 주님께 는 항상,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시며 간섭하십니다. 우리가 마땅 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간섭하시고 기도하시고 계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죄를 향하여 가 려고 하면 마음에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죄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지만, 저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그래서 되겠느냐'는 권면과 책망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주께서 다 하셨기에 이제부터는 '네가 다 알아서 해라. 너 어디 얼마나 잘 하나 보자'라는 식으로 우리 뒤에서 보시는 분 이 아니신 것입니다. 직접 간섭하시고 감동과 감화와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스데반을 죽이고 살기가 등등하여 신자들을 핍박하러 갑니다. 다메섹 도상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 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제가 언제 주를 핍박했 습니까' 여러분, 신자를 핍박하는 것이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라고 그럽니다. 얼마 나 놀랍습니까 나중에 분명히 심판대 앞에서 이런 음성을 듣는 자들이 있을 것입 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단코 홀로 있지 않습니다. 요14:18절을 보십시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우리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 를 구속하셨을 뿐 아니라 이제 영원히 당신의 자녀로, 갈라설 수 없는 부부라는 묘 사를 할 정도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거처를 함께하시며, 우리 의 일거수 일투족을 함께 나누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신자들의 특권이요, 자랑입 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결할 필요가 있고, 말씀을 따라 자신을 고칠 필요를 깊이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바로 이와같은 주님의 인도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 나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슬프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여러분 안에 계시고 여러분을 붙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절망과 낙심을 선언한 적이 한 두 번이었 습니까

<결론>

신자에게는 절망이 없습니다. 낙심도 있을 수 없습니다. 좌절과 영원한 실패도 없 습니다. 단지 혼자의 비틀거림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놀라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을뿐 아니라,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하여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지키시며, 보호하시며, 아무도 우리에게 손끝도 마음대로 대지 못하도록 지키고 계 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자녀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입은 자요, 동해하 는 자요, 동거하는 자이십니다. 이 놀라운 여러분의 신분과 이 사실을 성경의 약속 을 따라 확인하시고 여러분의 생활과 신앙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항복시키게 되시 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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