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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 비젼 (시 105: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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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통해 낳은 요셉을 다른 어떤 아들보다 더 끔찍히 사랑했다. 채색옷을 지어 입히고 품안에 두며 사랑하였다. 요셉은 꿈을 잘꾸는 사람이었는데 그때마다 형제들에게 자랑함으로 꿈꾸는 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요셉이 꾼 꿈 이야기 둘의 내용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들판에서 열 한 볏단에 일어나 자신의 볏단에 절하는 꿈과,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도 꾸었다. 이 일로 인하여 형제들은 화가 나고 요셉을 시기하고 급기야 애굽에 종으로 팔아 버렸다. 요셉은 애굽 상인들에게 의해 다시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렸다.요셉은 종의 신분으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일하였다. 보디발은 그를 신뢰하여 가정 총무로 세우고 모든 일과 소유를 그에게 맡겼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창 39:5-6)”
요셉의 준수함에 반한 보디발의 아내는 끊임없이 요셉을 유혹하였다. 요셉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혹을 물리친다. 보디발의 아내는 이 일로 무고히 요셉에게 누명을 씌워 그를 감옥에 갇히게 했다.
“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 39:19-23)”
40장에 술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이 들어오는 이야기로 사건이 진전된다. 37장과 39장 사건에 보면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요셉은 신임을 얻는다. 그리고 이런 말씀들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그가 잡혀있는 곳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힘으로서 그가 형통하게 되었다. 팔려간 것은 무엇이고 유혹을 당하였을 때 그 무고를 풀어주시는 이는 하나도 없고 감옥에 들어가서 형통케 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우리는 이 말씀을 인하여 요셉이 종으로 사는 것과 감옥에 사는 것이 종과 갇힌 자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심으로 평탄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자.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8-19)”
요셉은 13년간 옥살이를 했다. 요셉은 그가 비젼과 신앙을 갖고 있어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어서 버텨냈다. 왜냐하면 ‘그가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응할 때까지 쇠사슬에 상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셉은 엄청난 꿈을 꾸었으나 현실은 그 반대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었다. 꿈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현실에서 소리치며 탄식의 세월을 보냈다. 왜 하나님은 요셉을 그런 환경 속에 몰아넣고 또 방치하신 것일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택을 대표하고 있고, 이삭은 하나님의 사람의 유업을 설명하고 있다. 구원을 얻었기에 하나님 앞에 성화를 이루는 것이 마땅한 존재가 야곱이었다면 요셉은 성화가 시행착오와 잘 잘못을 고쳐놓은 지점 이상의 ‘성장의 자리까지, 영화의 자리까지 끌고 간다’는 상징이다. 야곱은 성화이다. 성화란 성스럽다는 뜻이 아니라 그에게서 잘못된 것을 뿌리 뽑는 작업이다. 야곱과 요셉의 다른 점은 그것이다. 야곱은 그가 당한 모든 환난과 응보가 그의 잘못으로 인한 꾸중이요 형벌이었다. 자기의 잘못과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는 일들에 대해 그가 베어내고 뿌리를 뽑고 수술을 한 상징이었다면 이제 요셉은 자기의 잘못이 없는데 환난을 당하는 차원을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성도는 모든 잘못과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사랑해 나가는 차원의 습관들을 두둘겨 맞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무형의 교육이 필요하다. 수준에 관한 교육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요구하시고 계신가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모르고 있다. 구원이란 죽을 자리에 있던 우리를 용서하시고 축복의 자리로 옮겨 놓으시는 것으로 전부가 아니다. 훈련하사 일정한 수준에 우리를 올려놓고 싶으신 것이다. 그 훈련에 관한 이야기가 요셉이다. ‘너희는 너희의 잘못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고자 하는 작품을 위하여 훈련받는 자리에 초대받는다. 요셉은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시 105:18)” 여기에서 몸은 히브리어로 혼(魂)을 뜻한다. 그는 몸이 쇠사슬에 매인 것이 아니라 혼이 쇠사슬에 매인 것이다. 혼이 나갈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그가 겪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훈련하시는가 하면 막다른 골목에 넣으사 꼼짝 못하게 하시고 훈련하신다. 요셉은 한두번 터진 게 아니다. 악도 쓰고 10년 이상을 감당할 수 없는 길을 돌아서 드디어 그의 魂이 하나님 손에 의하여 완전히 붙잡혀 버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총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꿈꾼대로 그가 앉은 자리에 형들이 와서 무릎을 꿇었다. 이것이 요셉의 삶이고, 모든 믿음의 선진들의 삶이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 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 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하라(히 12:1-13)”
이 말씀 중 7절, 9절의 말씀을 먼저 살펴보자.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 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7)”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히 12:9)”
‘징계’란 말을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아들 만들기’이다. 아들을 만든다는 것은 낳는 것 뿐만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에 합당한 아들을 만드는 수준에 이끌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수준까지 이끌겠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자’라고 한다. 이 징계에 관한 이야기 즉 아들로 만드는 이야기에 관해서 이렇게 나온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 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훈련을 받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두 가지 반응을 진술하고 있다. 경히 여기는 것과 낙심하는 것이다. 경히 여기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채찍이 많이 있다. 잘못에 관한 채찍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인생을 살도록 하기 위한 채찍이다. 예수를 믿는데 ‘왜 나에게 어려운 일이 벌어지는가’탄식하게 된다. 불의한 자는 만사가 형통한데 믿는 나는 왜 하는 일마다 어려움 당하는가 그러나 불통과 징계는 오히려 사랑하심의 증거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전 역사를 두고 두둘겨 패셨다. 블레셋, 모압, 미디안, 아람, 앗수르, 로마, 헬라..... 등 끝없이 터졌다. 결국 현대에 이르러서는 나치에게까지 처절한 고통을 겪었다. 이 역사적 현실에 있어 분명한 것은 다른 민족이 이스라엘을 괴롭힐 때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외면했거나 신앙이 떨어진 때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랑하시기에 징계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영적수준으로 이끄시기 위한 시련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시편기자는 얼마나 억울했는지 이렇게 적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 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시 73:1-9)”
이스라엘 역사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목적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 그 자녀를 교육시키는데 잘못할 때마다 한대씩 때린다. 그런 가정교사는 공부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때리는 가정교사이다. 우리는 그렇게 부름을 받았다. 이 문제가 쉽지 않다. 우리가 여기 부름 받아서 이런 문제의 갈등 속을 거쳐와야만 된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요셉과 같은 꿈을 꾸게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동일한 목적을 우리에게 가지고 계신다. 신앙생활을 하면 한숨도 없고 갈등도 없고 고민도 없다고 착각하지 말라. 차라리 불신앙은 갈등이 없고 고민이 없다. 믿는데 주의 뜻대로 살려고 발버둥 치는데 계속적인 어려움이 있다. 우리는 아직 훈련을 더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직 요셉이 앉은 총리 대신의 자리에 가 있지 않다. 그것을 위해서 어디쯤 가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목표지점까지는 단숨에 가는것이 아니다. 성장의 개념을 지녀야 한다. 과정을 통해 그 수준으로 간다.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삶이라는 인생동안 이루어 놓으신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다. 믿음장을 제시한 이유는 무엇인가
11장은 “여기 이 세상을 훈련장인 줄 알고 다른 사람이 잘 사는데 대하여 한눈 팔지 않고 부러워 하지 않고 이 길을 축복된 길인 줄 알고 간 사람들이 여기에 이렇게 무수히 있었느니라”를 말씀한다. 11장은 12장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 전장이다. 그래서 12장 1절은 ‘이러므로’로 시작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여기서는 예수님도 그 한 예로 등장한다. 십자가라는 최악의 코스로 걸어 가셨으나 덕분에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가셨다는 말이다. 시편 105편으로 돌아와 결론을 내려보자.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시 105:21-22)”
요셉은 나이 30에 덜컥 총리대신의 지위에 앉은 것이 아니다. 그의 수준은 그가 당한 과거의 고난을 인하여 백관을 임의로 제어할만한 안목과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 그들을 교훈할만큼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다. 종살이에서, 감옥살이에서 배운 것이요, 얻은 것이다.
예수를 믿고나서 인생에서 축복을 받기보다 훨씬 고통스런 길을 걸어온 사람이 인생을 더 깊이 안다. 편안할 때 사람은 장님이 되나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는 의미를 찾게 된다. 우리들에게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각오를 하여야 한다. 그러나 또한 그게 축복이라는 점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평안을 위해 부름받은 게 아니다. 구원을 위해 부르셨고, 그 이후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성장이 목표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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