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인생의 고통 (욥 14:8-22)

첨부 1


인생은 근심, 걱정, 눈물, 탄식, 고통으로 뒤범벅이요 악순환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고해라고도 하고, 눈물의 골짜기라고도 합니다. 성경에는 여인에게서 난 사람이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를 위하여 지으신 세상이 기쁘고 좋은 것만 있어 하는데 왜 눈물과 탄식과 근심과 고통이 있습니까

1. 고통에 대한 일반적 설명 (1) 흑자는 전생의 죄라 합니다. 전생에서 지은 죄가 많아 금생에 태어나서 보응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설명은 불교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고통은 전생의 결과라는 말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2) 흑자는 금생의 죄라고 합니다. 다 자기가 잘못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지 무슨 다른 이론이 있겠느냐 합니다. 이 설명도 일리가 있는 그럴 듯한 이론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보면 죄는 죄인이 짓고, 벌은 의인이 받습니다. 의인 쳐놓고 편안히 살다가 편안히 간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악인 중에는 잘 먹고, 잘 입고 호화롭게 살다가 간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하니 이 이론도 많이 맞습니다. (3) 부모의 죄라고 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 설명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성병균을 보유하다 자녀 낳고 보니 맹인 불구자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 자녀는 부모 죄 때문에 세상에서 평생 병신으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자녀는 낳기는 바로 낳았으나 먹이지 못하고 교육시키지 못해서 생존경쟁에서 낙오된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시원한 숨 한 번 못 쉬고 일생 고통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부모의 죄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4) 흑자는 사회의 죄라고 합니다. 사회의 조직과 제도가 잘못되어 그 조직 안에 사는 사람이 고통을 당한다는 설명입니다. 이 설명도 역시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잘 되었다는 이상적 제도 아래에서도 고통은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제도 사회에서도 누구는 즐겁게 살고, 누구는 고통을 당하는 것을 우리는 보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것도 꼭 들어 맞는 설명은 못됩니다.

2. 고통에 대한 성경 해석 (1) 하나님의 법도 신 28:1-4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여 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여 네게 마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네 모든 가축과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까지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신 28:15-19에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여 내가 오늘 날 네게 명하는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과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요 내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나가도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세우신 법칙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법대로 순종하여 살면 기쁘고 즐겁고 복될 것이요, 그 법clr에 위반될 때에는 고통과 패망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인생들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여 복되게 살게 하시려고 고통의 법칙을 세우신 것입니다. 국법은 백성을 벌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니오, 백성들로 범죄치 않고 법대로 잘살게 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도 우리로 복되게 살게 하기 위함이니 그 법을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2) 인격 연단을 위해서 롬 5:3에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는다”라고 했습니다. 강석이 변하여 강철이 되고, 금과 은이 되기까지는 불에 타고 두둘겨 맞고 한 후에야 강철도 되고, 금도 은도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되는 것도 이렇게 환란과 고통의 연단으로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문화향상도 환란과 고통 중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전 1:15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고통주심은 괴롭게 하기 위함이 아니요 사람을 연단시키고 범죄치 못하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만 믿게 하려 하심입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도 힘에 지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줄로 알기까지 고통을 당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고통 중에서 크게 깨달은 바 있었나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믿게 하려는 섭리와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고후 1:8-9). 사람이 밥 잘 먹고 옷 잘 입고 편안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가서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무리 위대한 신앙의 사도라도 갈채를 받고 천인의 환영을 받을 때보다 이제는 죽는구나 하는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찾게 된 사람이 거의 다 그렇습니다. 돈을 많이 모아 부자가 되어 하나님을 찾는 사람보다, 있던 재물을 다 탕진하고 할 수 없는 지경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더 많습니다. 새로 혼인을 하여 가지고 감사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보다, 아내를 잃고,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고, 홀애비가 되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아들을 낳고 딸을 낳아 감사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보다 딸이 죽고 아들 잃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찾는 자가 더 많습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사람들로 하나님의 품으로 몰아 넣습니다. 고통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찾게 하는 선교사입니다. (4) 본향을 사모하게 하려 하심입니다(히 11:15-16). 집 떠난 나그네가 얼마 동안은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달이 가고 해가 가면 그 객지에서 정이 들고 친구가 생겨 고향을 저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몸이 병들어 병원 침상에 눕게 될 때 고향이 그리워지고 부모 처자가 생겨나게 됩니다. 어린이들이 양지 쪽에서 동무끼리 장난에 미쳤을 때는 집을 잊어버립니다. 어머니가 불러도 안 들어갑니다. 그러나 돌풍이 불거나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그제서야 아이는 어머니를 부르며 자기 집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평안하고 기쁘기만 할 때는 본향도 하늘나라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소망이 다 수포로 돌아가고 의지할 곳이 없게 될 때 그제야 사람은 본향인 아버지의 나라를 사모하게 됩니다.

3. 고통에 대한 신자의 태도 (1) 없기를 바라지 맙시다. 사람의 생각 같아서는 잘 믿고 순종하는 의로운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고통을 면제케 하시고 거역하고 범죄케 하는 죄인과 악인에게만 질병이나 천변지변으로 징계하시면 좋을 것 같다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우로를 차별없이 내리십니다. 이와 같이 고통도 의인이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찾아드는 것입니다. 한 가지 다른 것은 믿고 순종하는 의인에게는 연단하는 기회가 되고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기도는 “고통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가 아니라 “고통을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기도입니다. (2) 기쁘게 여기고 감사해야 합니다. 고통은 그릇된 길에서 떠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인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나를 더 강하고 굳센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연단이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세상살이에 지쳐버린 나에게 하늘나라를 사모하게 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믿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꼭 믿게 하는 은혜이기도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때도 감사와 찬송을 해야 하지만 환란과 역경 중에서도 기쁘게 여기고 감사와 찬송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3)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마음이 민망하고 답답하여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진실로 주님께는 그 순간이 고통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의 쓴 잔을 면케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잔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도 어떤 고통이든지 당할 때 후퇴나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억지를 부릴 것도 아닙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온 영혼을 다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시어 뜻대로 합소서 하는 것이 고통에 대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4) 일어나 전진합시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닥아오는 십자가의 고통을 다 아버지께 맡기고 제자들에게 오시사 제자들을 깨우시며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결박을 향하여, 십자가를 향하여 전진하였습니다. 이처럼 신앙인에게는 후퇴는 없습니다. 오직 전진이 있을 뿐입니다. 고통 중에도 죽음 앞에도 기도가 있고, 찬송이 있고, 봉사가 있고, 복음을 증거합니다. 오직 전진 뿐입니다. 고통은 좋은 것도 아니요, 나쁜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취급하기에 달렸습니다. 믿음으로 당하면 복이요, 절망과 불평으로 받으면 저주가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나니라”(롬 8:28)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환란과 역경을 통하여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화가 복이 되도록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