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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부흥과 젊은이 (딤전 0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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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지금은 자유롭게 살다가 나중에 늙으면 신앙을 갖겠다고 말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아마 신앙을 늙은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으로 생각 하는가 봅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도 종교는 필요합니다. 과거의 위대한 종교인들은 모두가 젊은 시절에 종교생활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공자는 30세에 뜻을 세웠고 석가는 29세에 불도의 길에 나섰고 플라톤은 23세에 소크라테스를 따르려고 결심하였으며 예수님은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였으며 바울도 30세에 회개하였으며 어거스틴은 33세에 신앙을 다시 찾았고, 캘빈은 25세 때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켰으며 본회퍼는 28세에 바르멘 신학 선언문에 서명을 함으로써 히틀러에 대한 반대운동에 가담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젊은 청년들로써 투철한 신앙을 가지고 생활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종교는 노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젊은이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며 또한 젊은이들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나 현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사람들의 생애를 보아도 그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양육되어지는 과정에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유명한 사람이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면서부터 논어, 맹자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태어날 때는 똑같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다음부터는 각기 상이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양육되어지는 과정에서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아야 하는데 만일 좋지 못한 교훈으로 양육 받게 되면 결국 그는 좋지 못한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양육 받음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양육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나라의 희망이요 미래를 짊어지고 이끌어 나갈 역군들입니다 어느 한 시인은 "나에게 젊은이를 보여다오. 그러면 그 나라의 앞날을 점치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젊은이들이 장차 그 나라를 이끌어 나갈 주역들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무쇠같이 튼튼한 젊은이들의 팔과 다리 그리고 바윗돌이라도 부셔버릴 듯한 우렁찬 음성, 달려가는 기차라도 멈출 수 있을 것 같은 젊은이들의 기백, 꿈과 원대한 희망으로 빛나는 그들의 눈동자, 의와 진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이라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정의감, 이런 젊은이들의 기상과 그들의 들끓는 피와 용솟음치는 맥박의 고동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그 사회의 밝고 희망찬 내일을 예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젊은이들에게서 이런 기상이나 맥박대신 맥 빠진 팔과 다리, 축 늘어진 두 어깨, 촛점을 잃은 눈동자, 비뚫어진 양심을 보는 순간은 무엇인가 괴롭고 암담한 미래를 예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회를 되돌아보면 "청년부재 "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젊은이가 무시되어 왔고 젊은이들 스스로도 젊음을 잃어가는 시대가 오래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4 · 19혁명을 계기로 60년대에 들어오면서 젊은이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의 부조리에 과감히 항거하면서 옳은 것을 추구하려는 용기를 보여 주었고 한국 사회의 새로운 젊은 이상을 부각시켜 주었습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1960년대론 젊은이들의 운동이 하나의 세계적 추세로 등장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때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히피족이나 벌거벗은 나체로 거리를 뛰어 다니며 벌였던 시위행위는 모두 이유 없는 반항 같지만 저들의 입장에서는 현대 문명과 기성 질서 속에서 질식할 것만 같은 자기들의 삶을 되찾고자 몸부림치는 것이며, 이 사회에 대해 이유가 있는 반문화, 반체제운동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만의 청년문화를 형성하고 새로운 종류의 새 세대를 창조해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기성세대는 젊은이를 미성인으로 취급하려는 태도를 처해 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오히려 어른들이 "소모된 청춘"젊음의 찌꺼기"로 불릴 만큼 보는 각도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어른이 젊은이들의 모범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젊은이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짙어서 젊은이들이 패기가 없고 소극적일 때 점잖다고 칭찬합니다. 좀 혈기왕성한 패기와 기상으로 무엇을 하려 하면 아직 어려서 그렇다는 식으로 젊음을 무시해 왔습니다. 어느 교포 학생이 솔직히 고백하기를 "우리 젊은이들은 참으로 불안합니다. 경험의 부족, 사상의 혼돈, 문화적인 갈등, 정치적인 불안감, 기성세대의 눈초리 때문에 늘 비틀거립니다. 술에 취한 것은 아닙니다만, 우리 젊은이들은 많은 이유로 인하여 비틀거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확실히 젊은이들은 흔들리는 터전 위에 사는 세대들입니다. 어쩌면 시끄럽고 광란에 가까운 춤과 노래는 이런 삶의 한 표현 수단으로써의 반응일 것입니다. 딤전 4:12에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라고 했습니다. 젊음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추진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부정적 편견에서 보면 미숙, 경솔, 철부지 등으로 보여집니다. 화가인 세잔느는 미술학교의 입학시험에 낙제했습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잠재능력을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역사에 길이 남는 훌륭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과학자 에디슨도 국민 학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학업을 중단하고 집에서 따로 하는 것이 낫겠다는 책망을 듣고 자퇴서를 내고 가정에서 어머니의 지도하에 그의 능력을 나타내 과학계에 길이 빛날 위대한 발명왕이 되었습니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도 공과대학 입학시험에 낙제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자기의 잠재능력을 개발하여 몇 세기에 한두 명밖에 나오지 않는 천재적 과학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도 해군 사관학교 졸업식에서 59등으로 졸업한 평범한 사람이지만 그가 최선을 다할 때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청년의 특권은 이러한 원대한 삶의 가능성을 개발하기 위한 가장 좋은 때라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이러한 특권을 생각하는 수준에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가능성을 개발하고 창조하는데 있어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최선을 다할 때 무엇인가를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방향을 돌려 교회에서 갖는 청년의 위치를 살펴보겠습니다. 청년은 오늘의 역군이요 내일의 소망입니다. 세계의 모든 교회들이 한결같이 아시아의 교회를 젊은 교회라고 합니다. 이 말에는 아시아의 기독청년들의 활동이 크게 기대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부흥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부흥은 우리나라의 장래와 안보와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기독청년들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기독청년은 곧 내일의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내일의 소망이 있다면 이는 바로 청년들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먼저 자신이 새로와져서 모든 면에서 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기성세대가 하지 못했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여 마침내 우리가 원하는 교회의 부흥과 발 을 가져오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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