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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배신자의 입맞춤 (눅 22:4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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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는 누구나 다 잘 알다시피 스승을 은 삼십 냥에 판 사람이며 최후를 비참하게 마친 사람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가룟 시몬의 아들로(요 6:70) 예수님의 열 두제자 중 한 사람으로 뽑혀 예수님을 따라 다닌 사람입니다. 그는 당시 정치적 메시야를 열렬히 신앙했던 사람이었으며 선악의 용단성이 있고 명철하고 치밀하여 이해타산이 빨랐습니다. 또 회계의 중역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아 예수님과 동료간에 신임을 얻었고 책임감도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런 인재를 잘 양성만 하면 훌륭한 전도자가 될 수 있음을 간파하였음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메시야관과 예수님의 교훈의 차이로 말미암은 그의 기대의 어긋남으로 스승을 은 삼십 냥에 팔아 넘긴 것입니다. 먼저 가룟 유다와 메시야관과 신앙의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살펴봅시다.

1. 가룟 유다의 신앙 (1) 그는 물질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금전에 대한 이해타산이 빨랐습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 중 전대를 맡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리사욕에 전대를 많이 썼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요 12:6에 나오듯이 요한이 그를 가리켜 “도적이라”고 혹평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가룟 유다는 금전제일주의자로 산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다 돈으로써 해결된다”라는 신앙관입니다. 신앙도 돈이 있어야 하고, 교회봉사도 돈이 있어야 하고, 전도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여인이 정성으로 옥합을 깨뜨려 향유로써 예수님께 봉사할 때,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낫겠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신자는 신앙으로 살고, 말씀으로 살고, 믿음으로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물질주의로 나아가다가 낙심하여 그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물질제일주의는 가룟 유다주의라는 것을 명심하여 신앙을 위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 외식주의 (허식주의)입니다. 3년간이나 모시던 스승을 은 삼십 냥에 팔았다는 사실은 그의 섬김이 하나의 외식이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외식은 스승을 은 삼십 냥에 팔고서 최종적으로 주님에게 입을 맞추었다는 사실은 그의 외식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렇게 되기 쉽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봉사를 하려 하고 남이 알아 주지 않으면 곧 실망해버리는 태도는 가룟 유다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 나라의 풍습 중에 입맞춤이라는 것은 가장 친한 사이끼리 행하는 예의였지만 가룟 유다는 이러한 것을 주님을 파는 신호로 이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외식 정도가 아니라 표리부동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그는 회칠한 무덤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도 나타납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한 교인인 양 자랑하지만 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인물이 많습니다. 우리는 진실한 신앙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3) 배신주의자입니다.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여러번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마 26:11-16, 눅 22:3-6). 그러나 가룟 유다는 끝까지 배신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살며 인간 상호의 협조로써 사는 것인데 그것을 거역함은 가장 악한 일입니다. 가룟 유다는 결국 주님 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마태복음에 선을 쌓는 데서 선을 발하고 악을 쌓는 데서 악을 발한다고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의 명석한 두뇌, 그의 열심, 그의 부지런함을 선을 위해 쌓았다면 그는 베드로보다 더 큰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엇이라 했습니까 차라리 저가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 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탄했습니다. 그의 최후는 비참하게 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누구든지 가룟 유다의 신앙의 길을 따라가면 그 길을 밟을 것이니 그 신앙이 있다면 돌이켜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유다의 입술 47-48에 “열 둘 제자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그 입술은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입술이었습니다. (1) 가룟 유다의 입술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한 입술이었습니다. 유대의 언어 중에 최고로 존칭하는 대명사가 두 개 있는데 그 첫째는 “주여”라는 말이고, 둘째는 “랍비”라고 하는 말입니다. 주여라는 말은 “나는 종이라”는 말입니다. 종은 자유가 없습니다. “나의 몸도, 나의 물질도, 나의 생명도 당신의 것입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랍비라는 말은 당신만이 선생으로 당신만을 높이고 복종하고 순종하여 가르침을 잘 배우겠다는 고백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런 고백을 여러번 하였습니다. (2) 유다의 입술은 파렴치한 입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던 그 입술은 주님을 판 입술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같이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이 마지막 만찬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그저 연례적 행사로써 유월절이니 같이 모였을 뿐이라고 착각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즐거운 만찬의 떡을 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로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시는 심각한 말씀을 해주실 때 분위기는 돌풍을 만난 것처럼 긴장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근심하여 서로 돌아가면서 “주여 내니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같은 말로 “랍비여 내니이까”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라는 성화에 가룟 유다의 얼굴의 표정이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얼굴에 아무 가책없이 태연했으나 가룟 유다의 얼굴은 안절부절 새파랗게 질려서 당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 3:9에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 그 죄를 발표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염려하지 않으면서도 염려하는 척, 죄를 짓고서도 죄없는 척하는 입술을 가룟 유다는 가졌던 것입니다. 유다의 입술은 가증스러운 입술이요 파렴치한 입술입니다. (3) 유다의 입술은 주님과 입맞추는 입술이었습니다. 사람이 입을 맞춘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반가운 사람끼리 만나서 하는 반가운 인사의 일종이요, 둘째는 최대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입을 맞춘다고 사랑의 전체일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입맞춤보다 더 깊은 것입니다. 더 뜨거운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입 맞춤은 진정한 사랑이 담겨 있는 입맞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증한 악을 담고 있는 입맞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같은 외식을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파는 암호로써의 입맞춤을 가장 사랑하는 척하는 입맞춤으로 가장시킨 가룟 유다의 가증스런 입술이야말로 비열하고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여 겉은 깨끗한 척하나 속은 탐욕, 방탕이 가득하도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주여! ”라고 고백하면서도 주의 뜻대로 살지 못한다면 내 입술로 주님을 입맞춤으로 파는 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이 입으로 얼마나 헛되이 서원하며 주여 주여 하며 부르짖을 때가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입술을 하나님께 아첨하는 입술이라 했습니다. 시 12:3에 “이같이 아첨하는 입술을 하나님께서 끊어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한 입술로 단물과 쓴물을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입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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