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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덴의 반응과 부활에 대한 세 가지 자세 (행 17: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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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참 신이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기독교의 중심 교리인 부활을 증거하려 할 즈음에 청중으로부터 조소와 반대가 일어나 설교는 다 하지 못하였습니다. 설교의 깊과는 겨우 소수의 사람이 구도하였을 뿐이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듣고 어떤 이는 비웃고 어떤 이는 훗날 당신의 말을 다시 듣겠다“(32절)는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을 뿐입니다. 추상적 변론과 토론을 양식 삼아 살아가는 헬라인들에게 설교의 바른 반응이 나타나기는 어려웠습니다. 첫째, 비웃는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에피큐로스 학파는 현세만을 중시하고 스토아 학파는 죽으면 사람은 신성에 흡수된다는 범신론이기 때문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거부하였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확증해 보려고 하지 않고 비웃기만 했습니다. 둘째, 미확정의 반응입니다. 32절에서 ”훗날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말을 다시 듣겠소“ 한 것은 일단은 수긍을 하나 언젠가 듣겠다는 미확정의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세째, 바울을 따르는 반응입니다. 몇 사람이 바울을 따라와서 신자가 되었으니 34절에 나오는 ”아레오바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누시오, 다마리라는 부인, 그밖에 다른 사람들” 이었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오는 디오누시오가 최초의 아덴의 교회 감독이 되고 그 후에 고린도 교회 감독이 되었다가 도미티아누스 황제 박해 때 (AD 95)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마리는 디오누시오의 부인이라는 학설도 있으나 확실한 기록이 없으니 추측뿐입니다. 설교의 결과로 몇 사람이 믿었으나 아덴같은 큰 도시에 교회가 서지 못하였으니 아덴 전도를 성공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핍박도 없고 성공도 없습니다. 고린도 전도에서 고전2:2에서처럼 “바울이 십자가의 도만 전하기로” 한 것은 아덴의 학술적 설교와 철학적 설교, 교양적, 문학적 설교가 실패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37절 말씀에 “저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도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라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에 대한 설교를 열심히 하였으나 저들은 부활에 대해서 여러 가지 태도로 거부한 것입니다. 그리면 부활에 대한 몇 가지 태도를 살펴 봅시다.

1. 어떤 이는 부활을 비웃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자세입니다. 성경은 단순하게 말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듣고 어떤 이는 비웃었다”고 했습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에피큐로스 학파 사람들은 죽은 후의 생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토아파 사람들도 범신론을 믿기 때문에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당시만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6장에 노아 시대 하나님께로부터 홍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선포받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노아의 말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예고하신 대로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비웃던 사람들은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창18:19에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성을 불로 심판하셨습니다. 심판 전에 천사들을 통해 롯의 가족에게 이 사실을 말했습니다. 딸들과 약혼한 사위들에게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듣고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그저 늙으셔서 노망기가 든 것으로 여겼습니다. 롯의 아내도 이와 같이 비웃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 고모라의 문화적 생활을 버리기가 아쉬워 머뭇거렸습니다. 대궐같은 집, 좋은 전답, 좋은 가구, 많은 옷, 보석, 재산들을 다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떠나기는 떠나나 롯의 아내의 그 미음은 소돔 고모라 옛 집에 있었습니다. 천사의 부탁의 말은 불과 유황이 떨어지는 소돔 고모라성을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였으나 설마 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고 머뭇거리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성공한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비웃습니다. 예수 부찰을 비웃습니다. 예수 재림을 비웃습니다. 스스로 비웃는 그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 어떤 이는 주님의 부활을 믿는 것을 지연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것을 지연하는 사람이 비웃는 사람보다 더 많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내일 내일 연기합니다. 그러다가 마음마저 예수를 믿을 수 없는 타락된 마음이 되고 맙니다. 아덴 사람들도 바울의 증거를 듣고 “지금은 말고 나중에 듣겠다”고 지연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사람은 내일이라고 하니 여기에 비극이 있습니다. 그래서 잠27:1에서는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런지 네가 알지 못한다”고 경고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처녀의 비유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신랑을 맞을 준비를 게을리하다가 때가 늦어 버림받았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생활을 지연해서는 안됩니다.

3. 어떤 이는 부활을 믿었습니다 똑같은 설교인데 어떤 이는 비웃고 믿음을 다음에 미루었으나, 어떤 이는 믿었다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알아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믿을 때 하나님의 진리가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바울의 증거를 듣고 아레오바고 법정의 판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아 부인, 그밖의 여러 사람이 믿었습니다. 비록 적은 수였으나 바울은 믿음을 가지고 증거했습니다. 마10:12에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신앙입니다. 누구 앞에서나 주님을 시인하고 따르는 사람이요.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증거해야 내가 살고 내 교회가 생동하는 교회가 됩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순교까지 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뜻깊은 신앙, 이런 용기, 이런 담력, 이런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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