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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고침을 받음 (눅 08: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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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닥치는 비애는 사람마다의 사정과 처지에 따라 다를 것이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슬픔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 자식들은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식이 세상을 떠났을 때 부모가 슬퍼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장례식을 거행하는 중에 칠십 노인이 서른 살의 외아들이 죽어 장례지내며 슬퍼하던 그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으며,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은 자녀가 젊어서 부모님을 두고 세상을 떠나는 것은 불효라고 느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니 회당장 야이로의 12세 무남독녀가 죽으매 온 무리가 슬퍼 통곡했으니 야이로의 부처야말로 얼마나 슬퍼했겠습니까 외동딸이 죽었으매 더욱 더 슬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49절 말씀에 “아직 말씀을 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이라 하였습니다. 즉 야이로의 딸을 살리기 위하여 오시는 예수님의 수고가 헛것이 되겠으니 스승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시는 발길을 돌이키지 않으시고 그대로 가겨서 애통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라 그리하면 네 딸이 성하게 되리라” 하시고, 또 “울지마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무리들은 아이가 죽은 것이 분명하므로 비웃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며칠 전에도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말씀으로 살리신 바 있지만 지금도 죽은 아이의 싸늘한 손목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의 영혼이 도로 들어와서 마치 자는 사람이 깨어 일어남과 같았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모두가 놀란 것입니다. 과연 슬픔은 사라지고 기쁨이 충만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생의 모든 비애가 순간적으로 기쁨으로 바뀐 전환점이 있습니다. 이 소녀의 죽음이 지니는 슬픔을 누가는 대단히 통절하게 감지했습니다. 슬프게 했던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그 소녀는 외동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소녀의 부모가 지닌 유일한 인생의 등불이 꺼진 것입니다. (2) 그 소녀는 열 두 살 가량이었습니다. 서양의 열 두살 소녀는 동양의 열 여덟 살 소녀만큼 조숙합니다. 즉 이제 여성으로서 여명기에 들어선 여아였고, 그 소녀는 그 나이에 결혼까지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생명이 넘치는 아침에 그 소녀는 밤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장례식에는 이미 곡하는 여자들까지도 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의 장례식에 곡하는 여자들을 고용하는 것이 팔레스틴에서는 죽은 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기 때문에 결코 빠뜨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소녀가 이미 죽었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소녀가 잠을 자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진단의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소녀가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서 육체를 볼 때 사람들이 보는 바와 같이 소녀는 이미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소녀의 생명의 가능성을 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기후가 무더워서 죽으면 몇 시간 내에 장례를 치루지 않으면 송장냄새와 시체 썩는 냄새가 나므로 장례식을 빨리 거행합니다. 이런 시간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소녀의 생명을 되살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 매우 실제적인 문제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소녀의 일만이 아니라 그 소녀의 어머니도 생각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지나치게 흥분한 그 어머니의 신경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한 가지 일을 주신 것입니다.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장으로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설교하심을 제재했던 자이지만 그는 그의 자존심을 접어놓고 도움을 청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 때문에 멸망한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운 기적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자존심을 억누르고 겸손하게 자신의 궁핍을 고백하고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구하라 그러면 구할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라” 했습니다. 구하는 일 없이는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야이로는 남이야 무어라고 하던간에 그는 확고한 신앙의 소유자로서 주님은 무엇이나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심히 고통을 당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또 지난 한 주일 동안 슬픔을 당하여 고통을 받아 온 분이 계십니까 어떤 시인은 말하기를 인생을 고해인생이라 하였고, 또 눈물의 골짜기라 하였습니다. 현세가 이렇게 괴롭다고 해서 그런지 몰라도 고통과 슬픔이 없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생활이 부요하면 너무 부요해서 걱정이요, 생활이 극난하면 없어서 걱정이요, 자식들이 있으면 있어서 걱정이요, 없으면 없어서 걱정이요, 어떤 사람은 남편이 없어서 걱정, 어떤 사람은 아내가 없어서 걱정, 학생들은 입학난으로 걱정, 취직난에 걱정, 사람들은 이모저모로 걱정과 근심 때문에 슬퍼합니다. 그러다가 최후엔 이 모든 고통문제를 자살로 해결지으려는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자살은 죄악입니다. 이는 음부의 고통을 면할 수 없고, 하나님의 심판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람의 장래와 내세문제를 해결하는 비결은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모든 수고의 짐을 지고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모든 비애 중에서 고통하고 슬퍼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다 주께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때 모든 슬픔은 사라지고 기이 찾아올 것입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에 자기들의 수단과 방법으로 살려고 해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주를 깨우며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주님께서 깨시어 곧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바람은 잔잔하고, 바다는 고요하며 죽음의 공포심과 모든 슬픔은 사라지고 제자들에게 삶과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이처럼 가장 암담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과 차고 넘치는 은혜의 불가항력적인 능력 가운데서 소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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