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막 16:9-11)

첨부 1


여기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라는 제목 하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부활은 믿을 수 있는가 우리는 부활이 주는 축복과 은혜를 생각하기 전에 부활을 믿을 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이 문제를 좀 생각고자 합니다. 11절에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의 서신을 참고하면 당시에 이 부활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문제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 앞에 던져진 큰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의 상식은 죽은 사람은 죽음으로 인생을 종결짓는다는데 있습니다. 이 인생의 오랜 경험적 상식이 부활 신앙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항거하며 또한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다”는 이성주의가 이 부활 사실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취급하여 이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우리 인간의 상식이나 이성 아래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굴복을 당하고 말지는 아니합니다. 첫째, 우리 인간이 알고 경험하는 사실 가운데는 우리 상식으로 판단하지 못할 것과 우리 이성으로서 분석하지 못할 여러 가지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도 그 스스로가 불완전함과 절대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상식이나 이성에게 굴복시켜 버릴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상식이나 이성이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을 믿지 못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부활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부활의 사실이 이성과 상식에 굴복당하지 않을 이유는 부활이 사람의 경험이나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인간적인 사실, 초이성적인 사실, 하나님이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 역사상에 일으키신 하나의 특수한 사건이기 때문에 비판할 사건이 아니라 믿는 사건입니다. 이성적으로 분석해서 받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리에 나를 맡겨 그가 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참되고 바르다고 믿으며, 또 그것은 하나님의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것, 못 믿는 것은 우리 영역이 아닙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왜 불신하는 사람들의 기사를 특히 취급했느냐 하는 이유는 그것은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을 동정해서가 아니라 그 믿을 수 없다는 사람이 믿어야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는 말은 그 부활이 비역사적이라기 보다 그 사실에 대한 내 마음이 열리지 못한 탓이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건에 내가 굴복당하고 내가 사로잡히지 못한 탓이라 하겠습니다.

2. 믿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강권이 성령을 통해서 초대교회에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사도직을 얻을 수 있는 첫 조건이 “예수의 부활 사실을 증거한 사람이라”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와 여러 제자들은 예루살렘 무리들에게 예수의 부활하신 사건에 대해서 증거하였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도 부활의 설교를 중점적으로 하였습니다. 이상으로 보아 초대교회 모든 사도들은 예수의 부활을 전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이 사도들의 활동에 의하여 그 초석이 놓여졌다는 것을 감안할 때 기독교는 바로 이 부활 신앙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 15:13-14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였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했더라면 우리의 전도하는 것도 헛것이요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즉 부활 신앙을 갖지 아니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전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부활 신앙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부활 신앙은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진리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도 크고 강하기 때문에 죽음과 같이 모든 것의 종결을 짓고 마는 세력과 실재까지도 극복할 수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이 아무리 강하고 모든 사람의 마지막을 주장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강하신 사랑 앞에서는 그 강한 죽음까지도 죽어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활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사랑이 한 역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할 필요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제물로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냈으며 죄인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지극한 사랑을 표시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이 사랑이 크게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결정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렇게 강렬히 진실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죽음 속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만일 죽음이 사랑보다도 강한 것이었다면 그는 영원히 죽음 속에 있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했습니다. 사랑이 죽음을 이기고 그것을 정복했음을 깨달을 때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개선가를 높이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냐”고 말입니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속죄 제물로 희생당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사망을 이기고 다시 사신 부활의 영광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부활의 영광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우리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능력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을 행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에게 부활의 약속을 해주심은 다만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그의 사랑에서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잠자는 자의 처음 열매요 우리도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롬 6:6)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는 죽음이 종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 까닭에 죽음이 우리 존재의 종말이 될 수 없습니다. 죽음으로 우리 생의 기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부활로 이어진 영원한 삶을 삽니다. 사랑이 죽음보다 강함을 알아서 모두 부활의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