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예화 자기중심적 사랑

첨부 1


개를 키우다가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았다. 처음에는 귀여워서 다섯 마리를 모두 키웠지만 차차 커지니까 처리가 곤란해져 결국 개 보호소에 모두 갖다주고 말았다. 그랬더니 미국 친구 하나가 우리의 처사를 보고 정말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귀여운 새끼 때만 이용하고 이젠 버리느냐”하는 논조였다. 이 친구의 말에 무리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교훈도 있음을 알았다. 개나 고양이는 애완용이란 말을 흔히 붙이지만, 애완용은 바꾸어 말하면 자기 본위적인 이용물이란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짐승의 경우는 이 말이 통하지만 만일 상대가 인간인 경우는 모독적인 말이 된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백인들이 우리 흑인을 가끔 '착한 검둥이들'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애완물처럼 보는 감정에서 하는 말이죠”
“나는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흔히 본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에 과연 몇 퍼센트가 어린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으로 존중하며 말하는 것일까? 애완물을 좋아하듯 어린이를 귀여워 한다면 그것은 참 사랑이 될 수 없다.
내가 아는 사람 하나는 양녀를 드렸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여자 아이를 하나 데려다 키우면 귀엽기도 하고 위로도 되고 집안이 적막하지 않으리라는 자기 위주의 생각으로 양녀를 데려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애완용으로 짐승을 키우다가 커지니까 싫어지는 따위와 별차이가 없는 잘못된 생각이다. 애완은 사랑이 아니라 모욕이 될 수 있다.
강자가 약자를,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돈 몇푼 뿌리고 애완의 선심을 파는 아니꼬운 풍경을 수없이 볼 수 있지 않은가?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