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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에게 단호히 붙잡힌 자 (렘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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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에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처음에 천국을 전파하셨습니다(마 4:17). 기독교의 궁극적 목표는 이 땅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서도 빌라도를 향하여 요 18:36에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윤리나 도덕이나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전당"이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무궁의 땅입니다. 하늘나라 복음을 증거하는 예리한 세 말씀이 세 사람의 입술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1. 예레미야를 통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돌아갑시다. 때는 주님 오시기 전 약600여년전 요시야 왕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미 그로부터 100여년전, 북방의 앗수르에 의해 초토화되었으며 서남방에 있던 애굽은 믿을 수 없는 나라였으며, 동방에는 새로운 나라 바벨론이 일어나 고독하게 버티고 있는 남왕국 유대를 침략하려고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남왕국 유대국이 멸망당할 어둠의 날이 다가오고 있을 바로 그 때 예레미야는 왜 그렇게 불길한 예언을 한 것이었습니까 당시 유대 요시야 왕은 위대한 신앙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선한 정치를 할 뿐 아니라 성전을 개축하는 동안 감추었던 신명기를 되찾아서 민중을 성전 앞에 불러 신명기를 크게 읽고 민중의 회개를 촉구한 신앙의 왕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왜 예레미야의 입술을 통하여 위선과 거짓을 폭로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록 왕 자신은 신앙으로 서 있었으며, 지혜로 충고에 귀를 기울였으며, 종교를 개혁하는 일에 몸을 바쳤지만, 하나님은 유대 민족 깊숙한 곳에서 반복되는 하나님 배반, 거짓 맹세, 살인을 똑똑히 보셨던 것입니다. 속사람의 타락은 은폐시키고 성전만 드나 들면 성전은 곧 자기들에게 마술적 인 구원을 줄 것이라는 신앙의 위선을 하나님은 똑똑히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지자 예레미야의 눈물은 인간 예레미야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눈물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바된 사람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죄 짓다가 나라를 다시 로마에게 빼앗겼던 것입니다. 민중이 받는 고통은 부자유와 배고픔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종교지도자들 자신의 위선에 서 오는 정신적 공허! 그것은 삶의 자리까지 흔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이 민중의 깊은 고통을 뻔히 보면서도 보지 못한 것처럼 "위선"의 종교 속에 자신들을 감추고 자기 보존에 급급했던 당시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예수는 그들을 힐책했습니다.

3. 하나님 말씀을 깊은 심령 속에서 만나고 난 후 깊은 심령 속에서 우러나온 신앙 고백으로 그것은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의 외침입니다. 루터는 수도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었지만 부패된 카톨릭에 대해서 정면으로 부딪친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은 심령속에서 만난후에 생긴 용기였던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 예수, 그리고 마틴 루터의 항거 안에 깊숙히 흐르는 하나님의 신비적인 행동과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항거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를 회개하지 않는한 위선 앞에서 하나님은 항거하십니다. 비대해진 권력과 재산으로 교회를 미화하려던 중세 교회의 타락 앞에 하나님은 항거하셨습니다. 부정과 썩어진 것 을 종교라는 아름다움 속에 은폐시켜 온 종교지도자들 앞에 하나님은 항거 하셨습니다. 진실을 잃은 종교의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은 용납하시지 않는 다는 항거! 이 놀랍고 떨리는 신비 앞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은 썩어진 속을 선과 믿음이라는 형식으로 위장한채 그것을 영원히 보존하려는 위선입니다. 하나님께 단호히 붙잡힌 예레미야, 예수님, 루터는 거짓 앞에 생명을 걸고 항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칼을 쓰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마26:52에 "네 검을 도로 집에 꽃으라 검을 가진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예레미야와 루터의 항거는 위선과 위장을 깨뜨리는 항거임에 틀림없었으나 그 항거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폭력은 단호히 거부되었습니다. 정당한 이유에서도 폭력은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폭력은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폭력은 사랑이 없기 때문에 구원하는 힘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예수님, 루터의 항거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항거는 그것을 위장하려는 위선, 또 그것을 계속 보존하려는 인간과 모든 제도 앞에 "아니요"를 던지는 항거라는 것에서 "하나님"은 이 역사의 잘못까지를 은폐하려는 모든 세력 앞에 심판자이심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예레미야의 항거의 이유가, 예수님의 힐책의 이유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항거는 파괴를 위한 항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항거에는 사랑과 구원의 목적이 살아 있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을 항거 했습니다. 하나님의 항거! 사랑하셨기에 진실 아닌 것을 항거하신 하나님의 신비! 이 신비의 음성을 예레미야, 예수님, 루터는 들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하나님의 교회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조작으로 속이 썩어가는 위선으로 멍들었기에 항거할 수밖에 없었던 루터의 신앙중심에는 영원토록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힘차게 부를 수 있었으며 다시 그 찬송은 루터의 친구 멜랑톤이 실망 속에 있을 때 한 어린 아이가 부르는 이 찬송 소리를 통하여 새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바된 루터와 우리들이기에, 우리는 자유하는 몸이 되어 모든 부조리와 위선 앞에 항거하도록 불리움 받았습니다. 나 자 신의 위선, 우리 가정의 위선, 우리 사회의 부조리, 우리 국가의 모든 위선 앞에 "아니오"를 말하도록 불리움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폭력에 의 한 항거(prostest)가 아닙니다. 사랑하기에 위해서 기도하고 또 설교하는 사랑의 항거인 것입니다. 자유는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종일 때만 자유일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고백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종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바된 사랑의 자유! 이것이 신교(prostestant)가 된 우리의 신앙의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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