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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율법학자와 철학자와의 변론 (행 17: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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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아가야 주(州)의 두도와 아덴과 고린도에서 전도했습니다. 아덴은 헬라의 수도요 과학, 문학, 예술의 꽃이 핀 문화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이 문화의 도시에서 바울의 활동은 특기할 점들이 많습니다. 첫째, 아덴 전도는 바울이 실라와 디모데를 데리고 아덴 거리를 거닐다가 도시에 우상이 많은 것을 보고 즉흥적으로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아덴 전도시 박해는 받지 않았고 잠시 후 고린도로 떠나 갔습니다. 둘째, 바울의 아덴 설교는 철학적이었으나 그 효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덴에서는 교회가 설립되지 않았습니다. 세째. 아덴 전도는 역사적 사실과 잘 부합됩니다 에비구레오와 스토이고, 아굴라, 아레이바고 등은 모두 헬라 역사 또는 세계 역학사에 나타난 이름들입니다. 바울은 베뢰아에서 떠나 배를 타고 남으로 삼백 마일 가서 아덴에 도착 했습니다. 당시에 종교의 도시 예루살렘과, 철학의 도시 아덴과, 정치의 도시 로마를 세계 3대 도시라고 하는 바 사도 바울은 아덴에 도착하여 그 기대가 많았을 것입니다. 아덴은 원음으로 ‘아데나에’ 혹은 ‘아테네’인데 당시 세계에서 문화 학문으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이제 이 도시에서의 바울의 활약을 봅시다.

1. 격분한 바울 16절에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라 했습니다. 아덴은 소크라테스의 철학, 솔론의 헌법이 난 곳입니다. 바울은 이런 철학 예술과 문명의 발원지인 지성의 도시 아덴 시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시내 골목마다 우상이 가득 가득 하였습니다. 온 성은 미신과 부패와 우상으로 꽉 찼습니다. 아덴은 헬라 문명의 중심지요, 민주주의의 고장으로 헬라의 찬란한 도시이며 국가의 맹주였습니다. 아덴의 권력이 최고로 달했을 때는 BC 478-431년까지 약 사십년간으로 파사의 침략군을 물리쳤을 때였습니다. 그후 BC 431년 이후 스팔라에게 패배하였고 BC 146년에는 전 헬라가 로마에게 정복당하였습니다. 로마는 권력으로 헬라를 정복했으나 정신사는 지배를 당했었습니다. 현대에 있어서도 헬라란 말을 들을 때, 전에 빛나던 예술과 철학을 상기하게 됩니다. 아덴은 신전의 도시로 오늘날에도 아크로폴리스(Acro-polis) 언덕에 있는 파르테논(처녀)신전을 비롯하여 프로필레아, 에레크레둠 등의 폐허는 유명한 고적들로서 화려했던 헬라의 옛 문화를 추측케 합니다. 아덴 시에는 유대인도 있었고 유대인 회당도 있었으며, 회당에서는 회당장이 율법을 강론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아덴 도시의 우상을 보고도 격분하지 않았으니 맛 잃은 소금이요, 불 꺼진 등잔이었습니다. 일본의 내촌감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상이 많은 곳에는 음란죄가 많다”고 하였으니 우상이 가득한 아덴 도시에는 자연히 음란도 가득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덴 미술, 예술은 음란한 도구, 우상 제조에 이용되었으며 하나님을 모르는 철학은 공리 공론의 궤변이었습니다. 아덴의 현 상을 살핀 바울의 마음은 격분했습니다. 헬라 문명은 부패했고 유대 종교 는 타락했고 로마의 정치도 혼미하니 당시 세계는 어두울 대로 어두워졌습니다. 이를 본 사도 바울은 마음이 격분하여 온 세계를 뒤집어 놓을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다시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2. 바울의 변론(17-21절) 예루살렘에서 유대의 율법 종교와 싸운 바울은 앞으로 로마에서도 싸우기 전에 아덴에서 헬라 문명과 다투어야 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단신으로 이방신 예배자들과 변론하고 회당에서는 개종한 유대인을 상대로 율법으로 전도하고, 거리에서는 헬라인을 상대로 철학으로 변론했습니다. 몇몇 에피큐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도 바울과 논쟁했습니다. 에피큐로스 철학이란 에피큐로스(Epicurus 42-27)가 창설한 학파로서 신의 존재는 믿으나 신의 섭리 초연성은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이성에 두지 아니하고 경험과 감각과 쾌락에 진리의 근본을 삼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함께 소모되기 때문에 향락을 지상의 목표로 삼는 유물론자들입니다. 이들이 신약시대에 와서 육욕주의자로 타락하였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300 BC에 Zeno가 스토아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스토아주의자라 합니다. 그들은 유심론자들입니다. 이 학파는 범신론으로 자기의 소 자아가 대 우주에 귀의해야 하며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리는 주의이며, 도덕주의를 강조하고 금욕주의를 강조합니다. 에피큐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현저하게 헬라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고, 로마에서는 스토아 철학이 크게 환영받아 황제, 고관들 중에 이를 추종하는 자가 많았던 것입니다. 이들의 철학은 실재론에 들어가 보면 우주론. 심리론, 인식론, 논리학, 윤리학, 정치학, 미학의 여러 문제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변론에 대한 아덴 시민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 첫째, 18절에서 “이 말장이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할 것인가”라고 했습니다. 말장이란 당시 아덴 사람들에게는 새가 곡식을 쪼아 먹듯이 지식을 단편적으로 끌어 모으는 자라는 말과 상통한 말입니다. 그들이 바울을 말장이라 했습니다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참 인생 철학을 말했습니다. (2) 둘째, 18절에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고 했습니다. 당시 아덴에는 끝없이 새로운 신들을 전하고 신상들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는 유일신 여호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들은 유물론 사상, 유실론 사상들이 대적하여 왔습니다. 아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21절 “가장 새로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고 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의 아덴을 이 말씀 한 마디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호기심과 탐구심이 헬라 문명을 창조한 것이며, 새로운 것을 좋아 하는 아덴 사람들에게는 바울의 교훈이 ‘새 교훈’ ‘신기한 것’으로 생각되지만은 기독교의 복음은 새로운 복된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지하게 믿어보려 하지 않았고 종교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므로 사도 바울의 아덴 전도는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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