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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발람의 패로 (민 2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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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신 18:18에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워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자입니다. 그는 결코 진리에다가 자의를 가하지도 못하고 감하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저 주하라는 자에게는 저주하고, 복을 빌라면 복을 빌고, 가지 말라하면 안 가는 것이 선지자의 임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패로라고 하는 것은 조건의 여하를 불문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하라는 것은 아니하고, 하지 말라는 것을 행하며 가라는 곳에는 안 가고 가지 말라는 그곳에 가는 그것입 니다. 12절 말씀대로 발람은 하나님께서 “너는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하신 하나님 명을 불순종하고, 가지 말라는 곳에 간 패로자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범함은 영원한 표가 되어 마치 소돔, 고모라와도 같이 우리 전 인류에게 위대한 경고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제 일차 유혹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를 격멸하고 모압 국경 가까이 도착하졌을 것입니다. 그 때 모압 왕 발락은 물론 국방을 위하여 일전을 각오했지만 그보다 더 사람에게 복을 빌면 그가 복을 받고 저주하면 그가 저주를 받게 되는 여호와의 선지자 발람을 불러 자기 민족을 축복하고 적 이스라엘 을 저주케 하여 이스라엘을 멸하리라 믿고 왕의 사신들을 선지자 발람의 집으로 보내어 설득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들이 발람 선지자에게 한 말은 “그런고로 청하노라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그대가 복 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선지자 발람을 높여주는 말로 선지자 발람에 대한 청원이고, 발람에게는 한 유혹이었습니다. 이는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주신 특권을 전 쟁에다 이용하려는 것이고, 하나님이 저주한 백성을 축복하고, 하나님「이 축복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케 하여 하나님과 사이에 적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시험과 유혹은 옛날부터 선지자들에게 종종 있는 것이었습니다. 신자에게도 있는 시험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에 선지자 발람에게 계시하기를 “너는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도 하지도 말라 저는 복을 받았느니라”고 하시었습니다. 이 명확한 하나님의 뜻을 받은 발람은 단연코 “너희는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희와 함께 떠나기를 여호와께서 허락치 아니하시리라”는 말로서 거절하였습니다. 이같이 발람은 제 일차 시험에서는 선지자의 면목에 조금도 손색이 보이지 아니 하였습니다.

2. 제 이차 유혹 모압 왕 발락은 제 일차 외교에 실패를 하였으나, 제 이차 술수을 행사 하게 되었습니다. 그 방법은 15-16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전보다 더 존귀한 외교가, 더 많은 수의 사신을 보내어서 “오기만 하면 크게 높여 존귀케 하고, 그 요청이면 무엇이든지 수응하겠다”는 두 가지 큰 호조건을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주를 시험하는 사단이 “돌로 떡 만드는 것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두 가지를 제안해도 주님이 응하지 않으니까, 천하 영광을 다 주겠다는 호조건을 붙여서 유혹한 것과 같습니다. 이는 사단의 세계에는 흔히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제 제 이 차 시험에 대한 선지자 발람의 대책은 이러했습니다. 18-19절에 “발락이 가득 찬 은금으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말씀을 어겨 덜거나 더하지 못하리라 그런즉 너희도 이 밤 에 여기 유숙하라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런지 알아보리라” 하고 그 밤에 또 하나님의 성지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 선지의 말과 일을 보면 발락이 아무리 많은 은금을 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성지를 구한 것은 제 일차 때의 방법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성지이면 그럼직한 좋은 대책인 것 같은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발람은 벌써 시험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그의 심중에는 발락이 주려던 존귀한 은금 보화가 그 성 화된 선지자의 마음을 더럽힌 것이었습니다. 인간 물욕과 명예심이 그를 혼탁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 신앙심이 부귀공명으로 돌아진 것입니다. 그가 “아무런 존귀와 은금을 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 못한다”고 한 말은 벌써 생명을 유실한 선지자들의 발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발람은 전번에 분명히 “너는 같이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이번에는 가라 하실 리가 없는 것은 당연했음에도 그는 반복해서 물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 일차 시험 때와 같이 “너는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 하는 대답이 있을 뿐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절 말씀처럼 “아무리 많은 은금을 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 못한 다”는 말을 하고 나서 “너희도 여기 유숙하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리라” 하고 “하나님이여 가리까 말리까” 한 것이 벌써 그의 마음이 어두어짐을 밝히는 것입니다. 일견에 발람 선지의 조치는 가장 옳은 것 같고 참된 신자의 생활상 같이 보이지만 큰 위험을 초래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마음이 어두워지고 가고 싶은 야심을 심중에 지니고 하나님의 지시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려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20절 말씀에 기록되었듯이 “함께 가려니와 내가 네게 이르리란 말만 준행하라” 하는 풍자적 응답을 주었습니다. 여기 “함께 가라” 는 주의 말씀은 그의 가고 싶은 야욕을 찬성하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즉 “어디 갈테면 가 보아라 무슨 좋은 수가 있는가” 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음에도 자의에 행하려고 하는 자에게 경고하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이 말을 듣고 발람은 이른 아침에 나귀를 타고 출발했다고 성경 본문에 기록되었습니다. 이로서 발람 선지자는 벌써 선지의 자격을 유실하고 못 갈 길을 감행하는 거짓 선지, 말하자면 하나님에게 받은 선지자의 특권을 남용하는 불경건의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3. 그의 패로의 진상 21절 말씀을 보면 발람은 전날 밤의 하나님의 경고를 하나님의 정당한 허락하시는 말씀인 줄로만 알고 평시에 애용하던 나귀를 타고 두 종을 앞세우고 발락 왕의 중신들의 옹위를 전후에 받으며 모압을 향하였습니다. 발람은 이제 모압 중신들을 전후에 세워서 마상에서 행사하는 그 위엄을 흥감하며 자찬하는 한편 이제 가서 한 두 마더만 하면 일국의 최고 부귀를 누리는 그 영광을 생각하고 희색 만만한 얼굴, 그리고 의기양양한 자태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발람의 길은 신약의 가룟 유다의 멸망의 길과 같았습니다. 가는 중 갑자기 그가 탄 나귀가 길을 떠나 밭 가운데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때 발람 선지는 나귀를 꾸짖고 종들은 얼른 나귀를 몰아본 길로 이끌어 보았습니다. 그 때 나귀는 다시 몸을 담에 대고 선지의 발을 담벽락에 비비면서 촌보도 옮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때 선지 발람은 노기충천하고 괘씸한 생각에 나귀를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나귀는 아픔을 못이 겨 몇 발자국 가다가 엎어지고 말았습니다. 발람의 분노는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노기는 살기로 변해서 손에 칼이 있었다면 당장에 나귀를 쳐 죽일 만큼 격분했고 나귀를 내려 칠 상황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성경에는 “천사가 칼을 들고 앞을 가로 막았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었고 그는 왜 칼을 빼어들고 발람의 갈 길을 가로 막고 쳐서 죽이려고 하였는가 우리는 이를 알아야 합니다. 이는 오직 발람의 가는 길이 어그러진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선지자에게는 역과 패를 겸한 못 갈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나귀가 본 천사를, 발람은 보지 못했다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못 본 것보다 안 보였던 것입니다. 오직 그 때 발람은 모압국의 부귀공명을 보는 것과 나귀가 길을 탈선하고 자기의 발을 담벽락에 비빈 그 사실만이 눈에 보일 뿐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주신 선민을 저주하러 가는 이것이 그의 패로인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말 못하는 나귀의 입을 열어 저를 훈계하셨습니다. 그 눈을 밝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기괴한 방법 밖에 그를 돌이킬 도리 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때 비로소 발람의 눈에 칼 든 천사가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과 “어찌하여 네가 나귀를 세 번이나 때렸느냐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였느니라” 하는 여호와의 책망의 음성이 들렸고 그는 자기 범행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때 발람은 “내가 범죄하였사오니 당신이 나를 대적하여 길에 선 줄 알지 못하였나이다 이 일이 당신 목전에 악이오면 돌아가겠나이다” 하고 엎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그러진 패로를 감행하던 선지의 회개입니다. 발람은 애당초부터 이런 무지 몰각한 낙오의 자리에 섰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패로의 길을 걷더니 영의 눈이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명예욕과 물질 때문에 눈이 어두워 안 갈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발람 선지의 타락은 그 원인이 물질과 명예였습니다. 썩어질 재물과 명예를 거룩한 천직, 선지자의 예언과 바꾸는 것이 선지자의 패로인 것을 말 해 줍니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은 발람 선지를 입으로는 “많은 은금으로 내게 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덜하지 못한다”고 부르짖으면서도 그 패로에 서게 하는 무서운 매력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알고 짓는 죄를 짓게 하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발람 선지자의 패로를 보고 영의 눈이 항상 뜨여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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