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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의 고난사와 하나님의 섭리 (창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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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는 헬라어를 Prononia라는 말로 표현되었고, 라틴어로는 Pro-Vidontia, 영어로는 Protidence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느 편이나 “미리 본다”는 예견을 의미합니다. 즉 장자될 일을 예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이 말을 사용할 때는 지적인 의미가 아니고 신적의사(新的意思)의 지배라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기독교 사상에 있어서 종종 섭리와 예지를 혼돈할 때가 있습니다. 섭리는 일반적으로 피조물을 보존하며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오늘 그대로의 세계를 유지하시려고 하심이 아니라 내일을 위하여 미리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섭리 신앙이라는 것은 미리 준비되어 있는 것을 향해 앞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으로 보아 우리들은 본문에서 모리아 산을 향해가는 아브라함의 섭리 신앙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가혹한 요구였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느냐, 안 바치느냐에 의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진실한가의 여부를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독자 이삭을 드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 아브라함의 순종

모리아 산을 향하여 가는 사흘 길은 아브라함에게 견딜 수 없는 번민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큰 고통은 이삭과 함께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유혹과 싸워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내닫는 한 걸음 한걸음이 투쟁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비롯 예수님처럼 십자가는 지지 아니하였지만 지시받은 산을 향해 오르는 길은 그에게 있어서 골고다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값진 것은 이러한 모든 번민과 고통을 극복하였다는데 있습니다. 이런 고통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그의 순종을 값진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독자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그 칼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 하셨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려운 순종 끝에 하나님이 왜 그런 고통을 주셨는지 알게 된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무조건적인 순종에서 하나님은 참 하나님으로 섬김을 받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 속에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 이후 처음으로 참다운 순종의 본을 보였고, 하나님은 참 하나님으로 섬김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진정으로 순종하고 경외하고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은총을 부어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순종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야말로 철저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시고, 인간을 인간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항상 순종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순종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그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기도 합니다. 요 6:38-39에 “내가 하늘로써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은 수난의 길, 갈등의 길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아버지이시여 아버지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인간 예수의 순종의 길은 정말 처절하고 안타까운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십자가의 극한적인 고통 속에서 예수님은 절규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철저히 자기를 비워 수난의 종이 되었고 죽기까지 순종하였습니다. 인간 예수의 철저한 순종이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셨으며 인간을 인간위치에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회복하여 놓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경외와 순종없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안에 기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3. 우리도 순종의 길을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뜻에 반항하고, 하나님의 뜻을 배신한 자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반역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좌절되느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유다의 사악한 행위를 통하여 성자 예수를 인류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어졌습니다. 오늘 날도 하나님의 섭리는 왕왕히 인간의 혼란을 통하여 시행됩니다. 세계 1차대전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곤란과 혼란을 초래하였습니다. 대전기간 52개월에 사상자가 2천만 정도였으며, 그 진통과 참상은 이루 필설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고아, 과부, 천만 명 이상의 패잔병의 미아는 비참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15개 평화조약이 나오게 하였습니다. 그 조약 중 다섯 번째가 민족 자결권을 부르짖은 조항입니다. 우리 나라도 그 때 자극받아 기미년

3.1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2차대전은 전 세계에 대혼란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 혼란을 통하여 독일 나치즘과 일본 신토이즘과 이태리 파시즘 등 하나님을 반대하던 국가들이 망하고 그동안 강대국들의 지배하에 압박과 착취를 당하던 수많은 약소 국가들이 자유독립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은 인간의 대혼란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진행하십니다. 구약에 요셉이 있습니다. 그는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로 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먼 애급에 팔려가 노예로 지내는 중 하나님의 은총으로 애굽의 국무총리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훗날 자기를 판 형들을 만났을 때 그의 말은 이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앞에 보내셨나니 그런 즉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7-8)고 했습니다. 여기서 요셉은 자기를 판 것이 형들이었던 현실을 부정하지 아니하고 그 사실을 명확히 인정하면서도 그 배후에 형들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성경상에 말세의 징조는 전쟁, 기근, 지진, 동족상전 등이 나타납니다. 그 가운데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재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말세의 징조로 일어나는 고난이 닥칠 때 더욱 깨어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려고 번민한 적이 몇 번이나 있습니까 말씀에서 오는 갈등으로 밤을 지새우며 잠을 못 이룬적이 몇 번이나 됩니까 우리는 너무 쉽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너무 안이하게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는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돌아섭시다.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시든 무조건 순종하며 나아갑시다. 그것이 내게 비록 고통스럽다 하드라도 돌아서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주시며 하늘의 신비로 우리를 풍성케 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지고 순종하는 자가 되어 하늘나라를 소유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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