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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때와 너희 때 (요 0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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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서 보면 예수께서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느니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6절 말씀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는 2절 말씀에 나타난 대로 초막절임을 알 수 있으며, 이 말씀을 하게 된 동기는 3-4절 말씀에 나타난 대로 그 형제들이 주님을 믿지 아니하여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라고 할 때입니다. 이 말은 선의로도, 악의로도 해석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선의로는 이런 촌락에서 묻히지 말고 예루살렘에 가서 그 위대한 역사를 공개해서 영예를 얻으라는 뜻이 되고 악의로는 그리스도의 메시야적인 설교에 대해 광적인 것으로 해석하여 비웃는 논조이며, 사지 예루살렘에 들어가 유대인들의 핍박을 한 번 당하여보라는 식의 몰인정한 불신앙에서 나온 말이 됩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아마 후자쪽이 형제들의 태도일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자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그 모친에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의 시초부터 줄곧 어떤 “때”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후에 제자들도 이해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 8:20에 “이 초막절에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서 성전 연보 궤 앞에서 가르치셨으나 유대인들이 아직 그를 잡지 못한 것은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 하시며 기다리던 “그의 때”는 어느 때를 말합니까 그것은 인류의 구속의 때, 십자가를 짊어질 때, 고난의 때를 의미하였을 것입니다. 요 12:23의 “인자의 영광을 믿을 때가 왔노라”고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짊어질 때를 영광의 때가 왔다고 기록한 것이나 주님은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잡히시던 날 밤에 유월절을 준비케 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어떤 집에 보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마 26:18)고 한 것, 또한 유월절에 음식을 다 잡수신 후 마지막 기도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하고 기도하신 것은 모두 이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늘 이 십자가를 그의 공생애를 통해서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 때가 이르기 전에 일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였던 것입니다.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시는 말씀은 십자가를 피하는 말씀이 아니요 오히려 십자가를 준비하셨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항상 기다리고 준비하셨던 “나의 때”는 곧 십자가의 때였고, 아들과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였던 것입니다.

1. 내 때와 너희 때 6절 말씀에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 되어 있느니라”라고 하시며 내 때와 너희 때를 대조하여 말씀하십니다. 자연도 때를 지킵니다. 렘 8:7에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 지 못하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때를 아는 자는 넓어지기보다 깊어지는 생을 원합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나타나 보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충성하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 때를 위하여 늘 준비하고 그때 이전에 망가지거나 수포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자입니다. 본문의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는 말씀을 보면 우리 주님 당신의 때를 파악하며 사신 것 같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하신 너희 때는 죄된 인간들이 자기 마음대로 시간을 계획하고 처리해 가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저들은 저들의 출세를 위하여 자유로이 때를 이용합니다. 언제나 이익을 위하여 때를 포착합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언제나 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기 때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의 낱말로 표시하는데 그 하나는 「호라」(요 2:4)로서 예정된 하나님의 시간(the destined hour of God)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는 가변적이 아니라 불가피한 것으로 논쟁이나 변경없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발생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시간입니다.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인데 이 말은 독특한 기회(opportunity)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일을 하기에 최선의 시간, 가장 적절한 기회를 의미합니다. 이 시간은 기회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 모르는 인간의 계획의 시간으로 포착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 순간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여기 예수께서 말씀하신 시간은 전자가 아닌 후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때는 수난의 십자가의 때를 가리킴으로 아직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죽을 때가 이르지 아니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행하였습니다. 인간의 조급함은 하나님의 지혜에 서서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모든 시간, 공간, 세계는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진행해야 할 것입니다.

2.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이제 마침내 예수께서는 자신의 때를 선택하시고 10절 말씀대로 형제 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후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셨습니다. 여기 예루살렘을 올라가신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게 됩니다. 이 본문은 또한 최대 관심사의 하나인 사람들의 예수에 대한 태도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 그의 형제들의 반응 예수님의 형제들은 1-5절에서 본 바와 같이 주님을 향하여 경멸적인 장난거리로, 반오락적으로 시험해 보는 반경멸적인 태도가 있었습니다. 흔히 재벌가, 유지의 위치에 있는 사람 중에는 목사를 한 고용인으로 보고 대수롭지 않게 반경별적인 태도를 취하는 자가 흔히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종교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삶과 죽음의 문제란 것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사람의 태도가 예수의 형제들의 태도였을 것입니다. (2) 증오의 태도를 가진 반응 주님은 환영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미움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7절, 19절). 미워하여 죽이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사소한 규칙과 규례를 무시하는 것이 미웠고, 사두개인은 정치적 단체로써 거의 모든 제사장들과 사두개인으로 로마 관리와 협력하였고, 사치와 평안을 추구하는 무리로 메시야를 원치도 않을 뿐 아니라 메시야란 문제는 그들의 최후에 생각할 문제이므로 메시야라고 자신을 증거하는 예수를 미워하며 증오했습니다. (3) 경멸의 태도 15절 말씀에 “이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주를 아느냐”고 하였고, 49절 말씀에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고 예수를 신학 전문교육이나 랍비 대학을 다니지 못한 배경을 경멸하고 예수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4) 무리들의 반응 무리들은 두 가지 반응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11절 말씀에서처럼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 가 어디 있느냐”하고 전적인 관심의 반응이었습니다. 예수가 인간의 한 위인이었거나 시인이었다면 무관심할 수 있으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삶 속에 올 때는 우리에게 가장 주목을 끄는 자일 것입니다. 둘째로 12-13절에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 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고 하는 논의(discussion)의 대상으로 예수를 보는 사람입니다. 이 논의에 대해서 사람들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는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12절에 “혹은 좋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좋은 사람 정도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고쳐주는 좋은 사람, 자선을 베푸는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2) 예수는 예언자라는 판단이있었습니다. 40절에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 혹은 말하기를 이는 선지자라 하며 ”라고 했습니다. 무리 중의 몇몇은 그래도 예수를 근접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을 앞서 말하는 자(forth-teller)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이들은 생명의 주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3) 귀신들린 사람이란 판단이 있었습니다. 20절에 “무리가 말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고 했습니다. 4) 예수는 힘있는 사람이었습니다. 46절에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몸에서 발산되는 일종의 생명력 전파가 하속들로 하여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깨닫게 했습니다. 이들에 게는 예수가 바로 보인 것입니다. 5) 니고데모의 반응 50-51절에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 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들의 당국자의 공의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변호를 위해 발언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적극적인 예수에 대한 믿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의 부류에 속합니까 예수를 단순히 자선가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니고데모처럼 소극적 신앙의 태도로, 혹은 더 나아가서 귀신들린 자로 취급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속들처럼 예수에게 몸과 정신 모두 미혹되어 담대히 전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때는 십자가를 지시는 때였습니다. 주님의 때는 인간들의 죄가 조금도 용납될 수 없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때는 세상의 죄악과 대결하는 때이요, 곧 십자가의 때입니다. 오늘은 십자가를 젊어지는 우리의 매순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때인 것을 느끼고 죄악의 순응을 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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