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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물보다 나은 것 (막 12: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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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이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상의 예물로서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 감사, 속죄의 댓가를 의미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간의 곡식과 함께 소나 양이나 염소나 산비둘기를 제물로 사용하였습니다. 제사가 이스라엘 종교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제물이 지니고 이는 중요한 의미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는 연중무휴로 제사가 계속되었고 제사장들은 반열에 따라 교대해 가며 제사를 집례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그만큼 열심히 제물을 봉헌해 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사를 제외하고서는 이스라엘 종교를 이해할 수 없으리 만큼 제사는 유대교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가 이처럼 성행하고 있는 반면에 부작용도 적지 않았습니다. (1) 제사의식을 종교의 전부로 착각하므로 종교적인 의무를 다했다고 하는 안이한 생각에 빠지게 되었고, (2) 제물을 종교 생활의 척도로 삼아 제물의 분량과 봉헌 회수에 따라 종교심이 상승되는 것으로 오인했고, (3) 제물 수요자의 편리를 도모한다는 구실 밑에 성전 경내가 시장화 되어가는 한편 제사장들이 종교 모리배롤 전락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과 신약 시대의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러한 의식적인 제사와 소나 양 같은 제물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라는 것을 거듭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제물보다 나은 다른 무엇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1. 하나님에 대해서는 순종을(삼상 15:22)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최초에 수행해야 할 과업은 아말렉을 진멸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들은 이스라엘의 적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왕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다는 구실로 저들의 우양을 끌고 왔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키고 말았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엄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명령을 거역해 가며 일방적으로 드리는 제물이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겠습니까 원칙적으로 그에 대한 대답은 어려울 것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보다 자아를 실현하려는 욕망이 훨씬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최고의 대상으로 삼고 힘을 다하여 경외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며, 목숨을 다하여 순종하는 것으로 최상선을 삼아야 할 터인데 자기 자신의 자아실현이 주체가 되고 하나님을 객체로 삼아 자기의 선에 하나님으로 하여금 호응시키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께 대한 큰 불경이며 오만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신 10:12). 그러나 사울왕은 감히 순종을 버리고 제물 쪽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아의 실현을 하나님보다 우위에 올려놓은 방자한 행위로서 하나님의 격노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사건은 사울에게 결정적인 패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실현의 선을 하나님께 강요하여 그를 끌고 가려는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간절한 기도와 오랜 묵상과 깊은 영교를 통하여 주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알기에 힘써야 하고,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의 뜻에 순종하기를 또한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광이었지만 그렇게 중하게 생각하는 전도까지도 성령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는 경우에는 그 활동을 보류하고 새로운 지시를 기다렸던 것입니다(행 16:6-7). 하나님께 대한 최상 선의는 곧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2. 이웃에 대해서는 자비를(마 12:7) 6.25사변 중 피난길에 대구 근방에 있는 어느 농촌 교회를 찾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 목사는 좀처럼 피난민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담임 목사가 결국 자기 교인들의 설득으로 양보는 했지마는 교회당 마당에서의 노숙을 허용했을 뿐 예배시간 외에는 피난민이 예배당 안에 들어오는 것을 종내 금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피난민들은 밤이슬을 맞으면서 팔공산 쪽으로 몰려오는 인민군의 포성 속에서 공포의 밤을 떨며 꼬박 세우곤 하였습니다. 그 후

1.4후퇴에 피난은 제주도로 갔습니다. 제주 시내의 교회는 밀려드는 피난 교우들을 우선 교회당 안에 수용해 주었습니다. 이는 앞의 교회와 대조적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종종 이 두 교회를 비교해 봅니다. 교회당의 신성을 끝까지 보수한 목사도 잘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교회당을 개방하여 피난민들의 형제를 하룻밤이라도 편하게 해 준 목사는 더 잘했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생깁니까 기후의 차이만은 아닌 줄 압니다. 교리 문제도 아닌데 피난민들이 동상 걸려도 눈여겨보지 않을 목사인 것입니다. 모두 예장의 목사입니다. 교양의 차이였습니다. 전자는 학식과 문견이 후자에 비해서 많이 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양의 차이로 커다란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을 때 오는 결과는 두려운 것입니다. 무식을 전통으로 착각하고 독선을 보수로 오인하기가 쉽습니다. 교회당은 교회보다 더 신성한 곳이 아니며 종교 규례는 인간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장로의 유전과 규례를 준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항상 백안시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야말로 율법을 어기는 자들로서 종교에 대해서는 형식적이요, 신앙에 대해서는 맹목적이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지한 자들 이었습니다(마 23:23) 옛날 아히멜렉을 찾아간 다윗은 피난길에 제사장 외 먹지 못할 제물을 요청했을 때 아히멜렉은 진설병을 내준 일이 있습니다. 진설병이란 안식일마다 여섯 개씩 두 줄로 성서의 떡상에 진열해 놓는 떡으로서 물려낸 떡은 제사장이 회막 뜰에서만 먹어야 하는 ‘거룩한 떡’이기 때문에 외인에게는 분배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배고픈 다윗에게 이것을 내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히멜렉 제사장을 율법 위반자라고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신약성서에도 이와 같은 기사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의 일행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일행은 몹시 시장했으므로 제자들이 밀 이삭 몇 개를 잘라 먹었습니다. 이런 일은 사회에서는 공인된 습성으로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시비를 걸어온 자들이 있습니다. 밀벼를 자른 것은 일종의 추수이며 추수는 안식일 규례에 위반되는 노동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노엽다 못해 슬펐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시고 다윗 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단과 사설에 대해서 엄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정통 보수 신앙에도 처음 사랑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 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신음하는 병자도 안식일에 잘 돌아보시며 세리와도 함께 음식을 잡수시고 창기와 강도까지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과거를 묻지 않고 쾌히 받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호 6:6)

3. 자신에 대해서는 통회를(시 51:16-17) 앞의 두 가지를 다 했어도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아직 할 만큼 못했고 될 만큼 못 되었고 도달할 만큼 도달하지 못한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부족을 부끄러워하며 아파해야 합니다. 이것을 성서에서는 상한 심령이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상한 심령을 더 기뻐하신다고 다윗은 그의 참회의 기도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 속에서 보면 어느 날 한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멀리 서서 얼굴도 들지 못한 채 “하나님이여 긍휼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의 기도는 바리새인의 화려한 기도에 비하여 너무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이 세리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세리의 기도 속에는 통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통회하는 심령입니다. 우리는 하루 동안 최선을 다해 살아 보십시다. 그럴지라도 저녁 기도를 드릴 때는 항상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엎드립시다. 한 주간 동안 성실하게 봉사하십시다. 그럴지라도 주일 예배에 나와서는 언제나 세리처럼 기도를 드리도록 합시다. 그때 우리 기도는 하나님께 열납 될 것입니다. 나는 겨우 사울의 제사를 반복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여전히 유전과 규례만을 능사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바리새인의 오만한 기도만 되풀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여, 이것들보다 주님이 진실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을 주께 드리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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