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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과 말씀의 역사 (사 5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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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인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영원토록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요 2:28에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겠다”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으면서 성령의 역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주신 것도 믿고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믿으면서 현재 우리 속에 우리와 같이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믿지 아니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성령은 헬라어로 “투아하”라 합니다. “코로 숨쉰다” 는 뜻입니다. 즉 바람, 생명의 호흡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설명하실 때 요한복음 3장에서 바람이 입으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눈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며 물질과 같이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가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우리가 친히 체험해야 더 확실한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틀도 오순절에 성령 받은 체험을 통하여 비로소 성령의 은총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할 것은 영이라고 하여 무조건 따라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초대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니케 아” 회의를 거쳐 중세기 스콜라 학자들의 논쟁을 거쳐 종교개혁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령의 역사가 여러 가지로 나타났기 때문에 오늘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1. 교회 역사에 나타났던 성령론 (1) 아리우스 성령론 AD 325년 “니케아” 회의 때 “아다나시우스“와 대립되는 삼위일체 론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아리우스” 주의자들은 성령은 하나님과 동등 되는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나 예수님께서 마음대로 시키는 천사의 일종이 라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2) 율법주의 성령관 성령을 우리가 직접 받을 수 없고 세례나 성례를 통하여서만 받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성령관은 로마 카토릭 교회와 루터 교회와 영국의 성공회 등이 가지는 성령관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어떤 사람이나 장소나 기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의식에 의하여서만 우리에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서 누구든지 받을 수 있는 것이 성령입니다. (3) 감정주의적 성령관입니다. 평범하고 형식적인 예배와 신앙생활에서 불만을 가지고 과격하고 감정적인 방법에 의해서 성령이 우리에게 온다고 믿는 성령관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술어로 엑스타시(Ecstash) 즉 “황흘주의” 라고 합니다. 구약 삼상 10장에 사울이 사무엘에게 안수받아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루 종일 옷을 벗고 예언했다고 했습니다. 2세기 중엽의 몬타노스주의 운동이라든가 15세기의 독일과 불란서에서 일어났던 멘델과 쉬벵크 벨트를 중심하고 일어났던 춤추는 은혜운동이라든가, 13세기 초에 불란서에서는 몸을 떨고 오그라뜨리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18세기에 요한 레슬러의 부홍운동으로 군중 가운데 떨고 울고 진동하고 방언하는 일이 많이 일어났는데 오늘날 한국 교회의 소교파 중에 이런 성령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오순절 교회의 성령관입니다. (4) 사이비 신비주의자들 보통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직접 통할 수 있는 은혜가 성령 받은 자에게서 나타난다는 성령관입니다. 성령을 받을 때는 교회도 필요 없고 형식제도도 무시해 버립니다. 그래서 신비주의자들은 교회도 무시하고 성경도 무시하고 부인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직접 하나님과 통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슐라이 마허” 몰몬경 교주 “조셉 스미스” 라는 사람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5) 복음주의적 성령관 예수님의 교훈과 사도 바울의 저서에 나타난 성령관과 니케아 회의와 콘스탄틴 회의에서 결의한 신경에 나타난 성령관으로 삼위일체 성령관입니다. “어거스틴” “칼빈” “루터”가 전해 준 성령관입니다. 본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동시에 같이 취급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의깊게 생각하여야 됩니다. 말씀을 통하지 않고 성령받을 수 없고, 성령을 통하지 않고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독수리의 두 날개처럼 서로 떠날 수 없는 불가분리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호세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위대한 예언자들은 우리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만한 커다란 성령의 역사가 저들에게 임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영은 지나가는 바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내용으로 하지 않는 은사는 참 은사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통하지 않고 받는 영은 성령인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바로 들어 올 때 성령이 우리에게 바로 임하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역사 4가지 조목 (1) 일시적 감화입니다. 구약 사무엘서에 보면 사무엘의 예언자 학교에서 사울 왕도 일시적으로 성령의 감화를 받았습니다. 오늘도 우리 교회 안에 신자들이 사경회 때나 부흥회 때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며 작정도 하며 결심도 하였다가 그 후 다시 그런 모양으로 돌아가는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 일시적 감동이 된 까닭입니다. (2) 외적 감동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보았다느니 무슨 영의 소리를 들었다느니 누가 믿게 되었다느니 병을 고침 받았다느니 떠들지만 그 마음은 옛 사람, 옛 습관 그대로의 사람을 말합니다. 훗날 가롯 유다의 본성이 나타나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교회의 직분을 받았다가 하나님에게 욕을 돌리는 자입니다. (3) 내적 감화입니다. 중생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하여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들어도 아멘으로 믿고 믿음으로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모태에서 태어나서 세상 빛을 볼 수 있는 것 같이 우리는 육신은 가졌으나 죄인이므로 다시 죽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성령을 받음은 바로 주님을 영접하는 새 사람으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중생한 사람은 지극히 작은 죄를 지어도 그 심령이 찌르고 아픈 것입니다. (4) 성령 충만입니다. 1) 이길 수 없는 열심 예레미야는 성령의 감동받아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했고, 베드로는 성령받아 하루에 3천명씩 회개시켰으며, 바울은 성령 충만으로 일평생동안 제 1차, 제2차, 제 3차, 로마 전도까지 그 사명을 다 완수한 것입니다. 2) 이길 수 없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날 사랑하시기를 강권하시니 그 사랑을 못잊어 열심히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하게 되며 전도하게 됩니다. 3) 이길 수 없는 봉사입니다. 맡은 바 사명을 죽도록 충성하여 생명을 바치며 순교로써 봉사합니다. 성령의 크신 감동으로 말씀탄고 은혜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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