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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문제의 논쟁 (눅 20:2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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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재림에 관한 내용은 눅 21장에 기록되었지만 본문 27-40절의 부활관에서도 예수의 내세관의 일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즉 육체는 죽어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안에 사는 자는 장차 불사의 몸을 받아 부활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하나님 안에 있는 자의 영원한 생명을 명백히 체험한 예수에게 있어서는 육체의 죽음과 함께 그 영의 생명마저도 사멸한다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앞에서는 산헤드린 첩자들이 가이사에게 세금바치는 것이 가하겠는가 불가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주님께 하여 주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지혜롭게 대답함으로 그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또한 본문에서는 사두개인들이 등장하여 사두개인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그들의 이론으로 주님을 책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1.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27절에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중……” 이라 했습니다. 사두개인 본부는 예루살렘에 있었고 그 인원은 소수였습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사두개파는 다윗 때의 제사장 사독으로부터 사작된 파입니다. 유대에는 크게 세 가지 파가 있는데 ① 율법에 충실한 바리새파가 있었고 ② 금욕주의의 엣세네파가 있었고 ③ 현세주의자인 사두개파가 있었습니다. 사두개파는 로마 정치의 추종자였고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하고 내세와 부활과 천사를 모두 부정하였습니다. 사두개파는 당시 제사장 계급이며 공회원으로 세력을 가졌습니다. 바리새파는 완전한 유대인계 종교파로로마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종교예식을 허락해 주는 정치라면 만족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 오경 외에도 구전으로 전해오는 전통을 인정하고 부활내세를 다 인정하고 믿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메시야가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경건하고 십일조, 금식기도에 충실했습니다. 모세 오경에는 사실 부활에 관한 기록이 없습니다. 이 모세 오경만을 믿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갖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두개인들은 율법에도 없는 부활에 관한 문제를 인정하는 주님을 책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근친·결혼법에 대해 언급하면서 부활은 없다는 것을 주장하려 했습니다.

2. 근친 결혼법 29-33절에 “일곱 형제가 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세째가 저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두개인이 부활을 부정하는 논거의 하나로써 제시된 것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부활 때에 한 여인이 일곱 남자의 아내가 되기는 매우 불합리하기 때문에 부활 그 자체도 불합리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들은 예수께서 어떻게 대답하실까 하고 그들은 침을 삼키며 대답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3. 부활에 대한 주님의 대답 34-3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회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부활 이후의 저 세상은 죽음이 없고 영생하는 곳이기에 결혼이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천사들과 똑같게 부활하며 하나님의 아들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관계가 저 하늘나라에까지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시험에 빠뜨리려 했지만 오히려 그 시험을 이용하여 주님께서는 부활에 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즉 천국은 일단 부활하기에 합당한 자들이 가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아예 거부했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갈 곳이라고 전제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4. 산 자의 하나님 37-38절에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요 이삭의 하나님이시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으므로써 “아브라함의 하나님”도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부활하여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모세 오경에 (신 1:6, 11:9)에 기록된 것을 인용하여 사두개인들에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5. 주님의 답변에 기뻐하는 바리새인 39-40절에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아무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고 했습니다. 서기관은 사두개인과 뜻을 달리하는 바리새인 중 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슬기롭게 사두개인의 질문에 대답하시는데 감탄하고 동시에 자기들이 사두개인과 신앙을 달리하고 있는 부활의 근거를 예수께서 주장하신 것을 기뻐한 것입니다. 더 이상 사두개인들은 질문하지 못하고 입을 막았습니다. 여기에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칭찬과 찬미의 소리를 올린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바리새인들 조차도 부활의 깊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가능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형식적 신앙, 외식적 신앙에 부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어 모두 하나님의 부활의 약속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분으로 영광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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