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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너를 놓겠느냐 (호 1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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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8절에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말만 들어도 눈물겹고 감격스러운 말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놓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십니까 이스라엘은 오늘의 우리 또한 나인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놓지 않으십니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렸을 때부터 사랑했습니다. 사 43:1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걸음을 가르쳤습니다. (3) 팔로 안아주셨습니다. (4) 병들면 고쳐주셨습니다. (5)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습니다. 신 29:5에 “주께서 40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런 은혜를 입었습니다. 어찌 이스라엘뿐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일생동안 나를 지키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지난 한 해도 고비 고비 위험과 절망 속에서 지키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2. 이스라엘의 배신입니다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는데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멀리합니다. 렘 2:31에 “무슨 연고로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돌아가지 않겠다 하느냐”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젠 그 만큼 우리도 클 만큼 컸고 성공할 만큼 했고 살 만큼 벌었고 일할 만큼 건강하게 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에게 예속되어 살 필요가 있겠느냐 자유롭게 살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생각을 버리고 멀리 다른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이것은 매우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들에게는 다 이유가 있고 핑계가 있습니다. 들어보면 다 일리가 있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분명한 것은 이유야 어떻든 조건이야 어떻든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나면 그 영혼이 시들고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이 탁해도 물고기는 물속에서 사는 법입니다. 산새는 깊고 깊은 쓸쓸한 산에서 사는 법입니다. 고래는 바다에서 사는 법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라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그 품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외롭고 괴롭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 17:8에 “나를 주의 날개 아래 그늘 아래 감추어 달라”고 했고,호 11:3에 “내가 너를 내 팔로 안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를 멀리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를 멀리하고 주님과 담을 쌓고 살 것이냐고 자신에게 물어보십시다. “너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우리는 세상 다 잃어버릴지언정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2) 우상 섬기는 죄입니다. 이스라엘이 섬긴 우상은 바알들이었습니다. 바알들이라고 하여 복수입니다. 본래 우상은 복수입니다. 다신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일신, 즉 한 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바알이란 말의 뜻은 주인 혹은 남편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까 이스라엘은 하나님 대신 나무, 돌로 새 긴 우상을 나의 주로 섬긴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남편을 버리고 우상 더러 내 남편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호세아 선지자는 호 1:1에 “음란한 아내”라고 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 하나님 보다 다른 그 무엇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영적 간음을 하는 자들입니다.

3.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1) 배신하였음에도 사랑으로 용서하셨습니다. 조건 없이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5절에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고 다시 가지 못할, 가선 안 될 애굽 땅으로 가겠다고 떠났고 결심하고 물러갔고 돌아오라 해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철저한 배신입니다. 이만 저만한 반역이 아닙니다. 배신이란 사랑의 반대개념입니다. 배신은 사랑이 없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이십니다. 하나님에게도 기쁨이 있고 슬픔이 있고 하나님께는 사랑이 있고 진노가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도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나면 하나님은 슬퍼하시고 진노하시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배신, 그것은 한 번 만이·아니라, 출애굽 이 후 호세아 선지자 때까지, 아니 앞으로 계속해서 입니다. 그것은 천 번 만 번 벌을 받아 마땅한 배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겠다 나는 너희를 내 손에서 놓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크신 사랑으로 이스라엘의 범죄사실을 회개만 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2) 진노의 사랑입니다(8-11절) 8-11절에 “나의 긍휼이 불 붓듯 하도다 나의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은 완전히 회개하고 배신행위를 종지부 찍었다는 말입니까 이제 하나님 마음에 든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긍휼은 “사랑하는 것”, “용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계속 배신합니다. 그런 배신과 잘못 속에서 사랑을 느끼고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때리지도 않으시고 하나님 자신이 매를 맞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은혜 속에 사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놓지 않으시고 붙들어 주신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아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의지하십시다. 매를 맞으면서도 나를 아끼시고 사랑하신 그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역경, 어떤 고난 속에서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강하신 팔로 붙들어 주시는 그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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