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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판 (히 10: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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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히브리서 저자는 신약 성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엄한 은사를 쓰고 있습니다. 저자만큼 죄를 두려워하고 가공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도 드뭅니다. 여기에 기록된 구절에서는 그는 신 17:2-6에 있는 엄한 경고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어느 누구든지 다른 신을 섬기며 거기에 절을 하는 경우에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와 여자를 성문으로 끌어내어 돌로 그 남자나 여자를 쳐 죽이되 두 세 증인의 증언에 따라 죽여야 하고 증인이 먼저 손댄 다음 모든 백성이 손을 대며 너희들 중에서 악을 제거해야 하느니라”는 것입니다. 저자가 이런 죄에 대해서 심판을 지적함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당시의 교회가 핍박을 받았고 또 앞으로 핍박을 받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 교회로써의 최대 위기는 교인이 사악한 일을 하고 주를 배반하는 일입니다. 박해 하에서 주를 배반하므로 교회의 약함을 세상에 누설시키는 교인의 존재는 교회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이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핍박을 받는 교회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충성스러움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일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지식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여진 지금, 죄라는 것은 두 배의 심각함을 지니고 있다고 저자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알고, 진리를 아는 자로써, 진리를 무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호소를 등한히 하는 경우에는 그의 받을 형벌은 남들보다 더 한층 엄한 것입니다. 지식이 깊어지면 그만큼 책임이 무거워지기 때문입니다. 옛 율법 하에서의 배신이 무서운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의 배신이란 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저자가 확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죄의 세 가지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죄는 그리스도를 발로 밟는 것이 됩니다. 죄는 사랑의 제물을 집어 올려 발아래서 짓밟는 일입니다. 죄는 율법을 거역할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상처를 입었을 때는 참고 견딜 수 있지만 마음을 짓밟힐 때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 것입니다. 히틀러의 공포 정치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반 나치스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급기야는 집단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서운 고문도, 모든 고통도 용기로써 참고 견디어 내었습니다. 그의 몸은 쇠약해지고 상했지만 굴복하지 않고 버티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누가 자기를 밀고해서 체포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밀고자는 다름 아닌 자기 동생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는 살아갈 기력을 잃고 죽었던 것입니다. 그는 적의 공격에는 참고 견딜 수가 있었으나 사랑하는 동생의 공격에는 참고 견딜 수가 없어서 죽었던 것입니다. 시이저는 암살을 계획하였던 자들에게는 굽힘이 없이 용기를 가지고 맞섰지마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 부르터스가 암살자에 가담된 것을 알고서 시이저는 그의 상의로 얼굴을 덮고 숨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믿는 신자들도 외적인 대적자를 대적할 수는 있지만 내부의 배교자는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내부의 배교 중에 가장 분명한 형태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짓밟는 것입니다. (2) 죄는 신성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처럼 무서운 일은 없습니다. 죄라는 것은 십자가상에서 희생의 제물의 신성함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3) 죄는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가르치고 우리가 좌편으로 기울어질 때에 주의를 주고 무기력할 때에 힘을 주는 것이 다름 아닌 성령인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지시와 경고를 무시하는 일은 성령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또한 성령의 호소와 초청과 명령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결국 죄는 율법에 거역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짓밟고 상처를 입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신자들 중에는 믿음이 착실한 사람과, 믿음이 약하여 타락하기 쉬운 사람과, 또 타락하고 배교한 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중에 진리를 아는 성도들이 범죄 하므로 말미암아 받는 보응과 배교자들이 받는 심판이 얼마나 중대한 가를 특별히 지적합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타락된 자리에서 회개하고 또한 신앙을 끝까지 굳게 지키어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격려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생각하라는 말씀과 일보 전진한다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곧 자기의 신앙의 척도를 생각하고 일보 전진하자는 말씀입니다.

1. 생각할 것이 무엇입니까 (1) 범죄자가 받을 심판의 중요성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요1서 5:16절에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고 합니다. 죄 중에도 용서함 받을 수 있는 죄가 있고, 용서함 받지 못할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요1서 3:4절에 “죄는 불법이라”고 했고, 요 16:9절에는 “저가 예수를 믿지 아니 함이라”고 했으니 즉 불법과 불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을 내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믿음의 대상도 하나님이시니 불법과 불신앙이 모두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으로 초점이 모아집니다. 그리고 죄 중에서 가장 무거운 죄라면 앞서 말한바,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예수님의 거룩하신 언약의 피를 부정하는 일이요,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이니 이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그의 피 공로를 믿는 것과, 은혜의 성령을 믿는 것인데 우리가 진실한 믿음으로 중생한 위치에서 성령을 힘입어 신앙생활을 잘하면 이것이 범죄치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2) 전의 선한 일을 생각하며 오늘의 고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전날의 선하고 잘한 것을 자랑하면 죄가 되지만, 이것을 기억하며 오늘 의 고난과 환난에 싸우는 무기로 삼고 승리의 발판으로 삼으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2. 일보 전진 뒤로 물러가 배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중한 심판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 곧 멸망에 빠질 자가 아니고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이니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매일 일보 일보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저 높은 곳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예비하시고 계시는 곳으로 장차 우리가 유업으로 향유 받을 곳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있을 곳을 예비하시고 오실 것이나 사람들은 주의 재림이 더디다하여 안심하고 뒤로 물러가 배교하는 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잠시 잠간 후에 지체하지 않고 속히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으로 인명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 그 징조입니다. 사도 바울이 딤후 3:1-4절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한 것이 지금 처처에 보이고 있으니 말세의 징조는 매우 뚜렷한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으니 우리는 믿음으로 주의 재림을 기다려야만 하겠습니다. 지혜 있는 다섯 처녀와 같이 기름과 등불을 준비하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약속대로 오셔서 모든 약속을 이루시고, 약속대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약속대로 반드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요,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믿음의 주요, 믿음을 주장하사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향하여 일보 일보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내려가는 길은 패망의 길이나 올라가는 길은 최후 승리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뒤로 물러 갈 것이 아니라 일보 일보 앞으로 위를 쳐다보며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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