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요나단의 우정의 다리 (삼상 20:35-42)

첨부 1


요나단은 다윗과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였습니다. 약속을 위해서 그는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그는 다윗과 약속한 시간에 약속한 장소로 갔습니다(35절). 요나단은 약속된 장소에서 화살을 쏘아 아이를 보내며 화살을 주어 오라고 보냈습니다. 그는 화살을 되는대로 쏘아서(36절) 화살이 그아이 머리 위로 쏘아서 “ 화살이 네 앞에 있느니라 ” 고 고함쳤습니다. 이말의 뜻을 다윗은 어린 아이보다 먼저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친구의 마지막 슬픈 이별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후에 단 한 번 수풀에서 만나본 것 뿐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23:16절). 다윗은 한 사람의 자유로운 친구로서가 아니라, 종의 입장에서 요나단을 존경하며 말했습니다. “ 다윗은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했다 ” 고 했습니다. 이는 요나단이 그에게 베풀어준 봉사에 대해서 그 은혜를 깊이 알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들은 서로 입을 맞추고 눈물을 흘리며 큰 애정을 품은 채 헤어졌습니다. 그들은 서로 목을 안고 울었는데, 41절에 “ 다윗이 더욱 심하게 울었다 ” 고 했습니다. 이처럼 진실한 두 친구가 헤어진다는 것은 두 친구에게 모두 슬픈 일이겠으나, 다윗에게는 그 슬픔이 더욱 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단이 그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심지어는 하나님의 성전으로부터 받을 위로마저 바랄 수 없게 되며 그 슬픔이 요나단의 것보다 훨씬 컸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슬픈 이별을 맞아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그들 사이의 우정의 맹세를 다시 한 번 서약하였습니다. “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들을 위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대대로 서로 신실하리라 하였노라 ” 고 하였습니다. 정말 다윗의 마음과 요나단의 마음이 연결되어진 우정이었습니다. 저들의 우정을 해치고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장애물이 많이 있었지만 둘은 마음과 마음이 서로 연결하여 하나의 우정의 다리를 세우고 그 구름다리에서 서로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요나단의 입장에 중점을 두어 우정의 구름다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마음의 구름다리 다윗이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마는 요나단이 믿음의 사람이라는 데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 줄 압니다. 삼상 14장에 보면 요나단이 젊었을 때 그의 부친 사울 왕 3천명의 상비군 중 천명을 거느리는 장군으로서 기브아라는 곳에 있었는데, 블레셋 대군과의 전쟁에 있어서 위기에 처했을 때, 요나단이 병기 든 소년 하나를 데리고 블레셋 진을 기습하여 적군을 궤멸시킬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삼상 14:6에 요나단이 병기 든 소년에게 “ 우리가 이 할례없는 자의 부대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 라는 말 중에서 요나단의 신앙을 넉넉히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요나단의 용기의 실체이며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요나단을 선두로 하는 블레셋 토벌전이 치열하여 병사가 시장하여 피곤해 있을 무렵 어리석게도 사울 왕은 무모하게 금식령을 발하고 이를 하나님께 맹세하였습니다(삼상 14:24). 이로 말미암아 병사들이 전투력을 상실하고 빈사상태에 빠지게 되었을 때 홀로 요나단은 이것을 모르고 숲 속에서 꿀을 지팡이 끝에 찍어 먹고 곧 눈이 밝아져 힘을 얻었으나 맹세를 깬 죄목으로 추첨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요나단은 “ 내가 다만 내 손의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 라고 장군답게 이를 자인했고, 사울도 “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 선언까지 했지만 민중이 반대하여 죽음에서 구출된 일이 있습니다(삼상 14:40-48). 요나단이 실수를 자인함으로 죽기를 면하고 용서받은 사실이 그의 믿음 때문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는 다윗이 골리앗과의 전투를 방불케하는 블레셋 궤멸전입니다. 이런 믿음의 용장들이 만나자 마자 즉시 우정이 씩튼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불가분리의 것이었습니다. 사실 다윗과 요나단을 비교해 본다면 신분, 지위, 환경, 기타 조건이 모두 다릅니다. 요나단은 왕자인데 다윗은 목동입니다. 요나단은 권세자요, 다윗은 쫓기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오직 한 가지 공통점은 바로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우정 관계라는 것이 다른 여러 가지 조건 아래서 성립이 되지만 결국 그러한 조건적 우정은 조건이 달라지면 쉬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매개로 한 우정은 신앙이 영원인 것처럼 우정도 불변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실로 그들은 믿음이란 재료로써 우정의 다리를 놓고 서로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2. 사랑의 구름다리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의 다리는 사랑의 수고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1)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사랑의 표준을 가르치실 때에 “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 고 하셨습니다. 남을 자기 몸처럼 사랑함은 사랑의 최고표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천하의 소유귄을 다 버리고서라도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 상정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몸처럼 사랑한 것입니다. (2) 희생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사랑은 이러한 자기 희생적 사랑입니다. 블레셋과 여러 번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올 때마다 백성들이 노래로 다윗을 환영하는데 “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 하였습니다. 사울의 질투가 일층 격심하여 두 번이나 다윗에게 창을 던졌습니다. 위급을 모면한 다윗이 라마 나욧으로 도망갔다가 돌아와서 요나단을 만나매, 요나단은 다윗에게 “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네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 고 약속하고 베들레헴으로 데려다가 숨겨 두고 우정을 다짐한 후 사울 왕의 살의가 있으면 신호의 화살을 쏘기로 하고 돌아와서 그를 위하여 계속 구출 작업을 했습니다. 그 후 월삭을 당한 조찬회 석상에서 다윗의 자리가 빈 것을 본 사울이 크게 분노하여 다윗의 행방을 묻고 요나단에게 대노하여 말하기를 삼상 20:41-42에 “ 패역부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함이 네 수치라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됨을 어찌 알지못하느냐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못하리라 ” 고 노발대발하여 요나단을 죽이려고 느닷없이 창을 던져 하마터면 단창의 과녁이 될 위기에서 모면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보자 요나단은 부왕이 살의가 있음을 알고 광야로 달려가서 신호의 화살을 쏘고 에셀 바위 곁에서 다윗과 만나 껴안고 눈물을 흘리던 장면은 실로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해 주는 감격스런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보호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알면서도 자기가 왕위 계승권을 가진 자로서 추호의 질투나 시기도 없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다윗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 것입니다. 참으로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희생적 수고가 없는 곳에 우정의 다리는 놓여 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서로 간에 희생적 수고와 사랑으로 사랑의 구름다리를 놓아야 하겠습니다. (3) 여인의 사랑보다 나은 사랑이었습니다. 요나단이 길보아산에서 전사한 후 이를 추모하기 위해 부른 다윗의 활 노래에서 다윗이 요나단의 사랑을 예찬했습니다. 삼하 1:26에 “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니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도다 ” 라고 했습니다. 요나단의 사랑은 친구에 대하여 진실한 자가 되었음은 그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먼저 진실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더 진실했고 능가한 사랑이었습니다.

3. 의리의 구름다리 삼상 20:15에 요나단이 다윗을 도와줄 것을 약속하면서 “ 여호와께서 너를 승리하게 한 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버리지 말라 ” 하고 피차 언약을 맺은 일이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대한 모든 의리를 다 준행한데 대하여 다윗도 친구의 의리를 지켜 그에게 보답하였습니다. 예측대로 사울 왕가는 몰락하고 다윗이 왕권을 잡고 요나단과의 의리를 생각하여 사울의 남은 유족들을 수사한 결과 요나단의 아들 절름발이 왕손 므비보셋이 발견되어 다윗 앞에 대령했을 때 다윗은 그를 왕자의 하나로써 대우하고 평생 왕의 식탁에서 식사를 함께 먹을 것을 약속하고 사울 왕가의 유산을 그에게 주어 구왕실 재산을 복구해 주었습니다(삼하 9:1-13). 실로 이들은 쌍방간에 의리를 존중함으로써 의리의 철근으로 튼튼한 다리를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친구간의 의리만 지킨 것이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끝까지 아들의 도리를 다한 것입니다. 권세욕에 눈이 어두워서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아버지 사울을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그는 다윗을 위하여 부왕께 간하고 아버지의 분노를 피하여 식사자리에서 퇴장한 일은 있지만, 그는 아들로서 한 번도 무례한 일을 하지 않았고 결코 배신한 일 없이 같이 있고, 같이 살고, 같이 블레셋과 싸우다가 같이 전사하석 벧산 성벽에 그 머리 없는 시체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부왕과 공생 공사 하였습니다(삼상 31 · 7-13). 다윗은 활 노래에서 삼하 1:23에 “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더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저희는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 라고 부자지정을 예찬하였습니다. 옛말에 “ 충(忠)하려면 효(孝)할 수 없고, 효하려면 충 할 수 없다 ” 고하였지만, 요나단은 실로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도리와 친구에 대한 벗으로서의 의리를 다한 자이었습니다.

4. 영원한 구름다리 이 세상에 아름다운 우정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영속적 가치를 가지지 못하고 무너지기가 일쑤입니다. 그것은 참된 믿음과 사랑과 의리로써 성립되지 못하고 이기적 조건적 편파적인 기초 위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이 죽을 때 그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섯살이었으니 그는 30세 전후하여 단명하게 살다가 죽었으나 그의 짧은 생애를 흠과 티가 없이 살며, 다윗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 번도 변함없이 죽기까지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관계는 죽음으로도 끝나지 아니하고 그 아들 므비보셋을 통하여 연속되었고 다윗의 후손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늘까지 계속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어 그 사랑이야말로 영속적인 우정이며 영원히 무너지지 않은 우정의 교량이 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불가결의 것은 인정인데, 그 인정 가운데 우정도 그 하나입니다. 친구가 서로 돕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실로 흐뭇한 일입니다. 다른 모든 인정의 결핍을 느끼는 자에게서 친구의 정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참된 친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속담에 “ 세상 친구는 그림자와 같아서 해 나는 날만 따랄 다닌다 ” 는 말이 옳은듯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이 참된 친구의 전형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입니다. 그리고 이 우정은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참된 우정의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친구가 없다 할지라도 참된 친구가 있으니 그 이름이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단절된 인정이 메마른 세상에서 참된 우정의 구름다리를 통하여 우리의 참되신 친구인 주님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