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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삭의 평화주의 (창 26: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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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랄 골짜기의 이삭은 여러 가지 인생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위대성에 비하여 이삭의 기사는 적은 분량이었으나 26장에는 이삭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리브가는 이삭의 호신책으로 쓴 거짓말로 블레셋 왕궁의 궁녀가 될 뻔하였다가 간신히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영적 상태로 타락은 안하였으나 신앙의 길에서 탈선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아브라함이 애굽이나 그랄에서 연출한 실패를 문자 그대로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혈통이 깨끗하여야 하겠기에 이삭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아내 리브가를 보호하시고 또 언약대로 물질의 풍성한 은혜로 주시었습니다. 이삭이 블레셋 땅 그랄 지방에서 농사하여 100배의 수확을 거두고 양과 소는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아짐에 따라 본토인들의 시기를 사게되었습니다. 축복이 있는 곳에는 곤란도 따르는 법입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은 이삭을 향하여 “ 네가 우리보다 크게 장성한즉 우리를 떠나 가라 ” 하였습니다. “ 네가 우리에게 손해를 끼쳤으나 우리 농사와 목축에 방해 되닌 떠나가라 ” 가 아니고, “ 크게 강성하니 떠나가라 ” 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의 사람 이삭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땀흘려 개간한 좋은 땅을 버리고 우물을 놔두고 떠난 것입니다. 가서 새 땅에서 우물을 다시 파서 얻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종들과 다툼에서 “ 에섹 ” 이란 이름을 두고 나서 떠났습니다. 다시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으나, 다시 다투는고로 대적한다는 뜻으로 “ 싯나 ” 라는 이름을 두고 또 떠났습니다. 다른 곳에 가서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는데 다투지 아니함으로 장소가 넓다는 뜻으로 “ 르호봇 ” 이란 이름을 주고 “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번성하리라 ” 고 했습니다.

1. 우물을 파는 평화주의

이삭은 평화주의자입니다. 이삭은 우물을 세 번이나 갈아서 팠습니다. 이삭은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양보하고 쫓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믿음의 관용이 그의 마음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부전자전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두고 한 말인지 모릅니다. 창 13장에 보니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나올 때 거부가 되었습니다. 조카 룻도 거부인고로 함께 거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룻을 부렀습니다. “ 우리는 한 골육이 아니냐 나나 너나 내 목자 사이에 어찌 다툼이 있을 수 있겠느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 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언약의 땅의 소유주였으나 선택권을 룻에게 준 것입니다. 룻이 좋은 땅을 다 취하였으나 훗날 이 땅이 소돔과 고모라 성으로 심판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같이 무 은 대 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권리를 롯에게 포기함으로 무욕을 나타내니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삭도 세상의 것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고 평화를 위해 옮기워 갔던 것입니다.

2. 남의 영역을 존중하는 평화주의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삭이 살던 원시 시대에는 토지도 넓고 국경도 없었으니 땅에 대한 관심도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은 블레셋 사람과 같이 남의 땅을 강제로 차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 날 세상에서 아무리 생존경쟁이 극심하고 민생문제가 복잡하다 할 지라도 남의 영역을 소중히 아는 평화주의자 편에 하나님은 서신다는 것을 잊지마십시오. 미국 미시시피 강변에는 낚시꾼이 많다고 합니다. 미시시피 강변에 낚시꾼들이 고기를 잡았다가는 다시 놓아주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잡은 고기가 손바닥만한 크기가 되지 못한 것은 다시 호수에 집어 넣어준다고 합니다. 즉 Back Home 시킵니다. 그 고기 이름은 노던파크라고 합니다. 이 고기는 가장 맛있는 고기이므로 한 사람이 한꺼번에 세 마리 이상 잡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부들은 고기는 많이 낚아도 한 사람이 세 마리 이상되는 것은 Back Home 시킨다고 합니다. 이런 행위는 자연을 보호하면서 언제나 풍요롭고 여유있게 사는 생활입니다. 이삭도 한 곳에 연연해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 따랄 자기가 거할 곳이 있으리라는 신앙 때문에 다툼이 있는 곳에 피해 살았던 것입니다.

3. 최후에 승리하는 평화주의

30-31절에 “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 고 했습니다. 쫓기고 쫓던 이삭과 아비멜렉 사이에 “ 믿음의 광장 ”에서 진정한 화해가 성힙되었습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광장입니다. 이 장소에서만 형제와 화목하고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 마 10:23에 “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 고 했습니다. 권리라 해서 다 주장하지 말라. 정당하다고 다 인정받을 생각 말라. 이 동리에서 핍박하거든 저 동리도 피하라. 양보하고 후퇴하라. 약해서 피하는 것도 아니요, 두려워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정당한 공의에 맡기는 태도입니다. 각오만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피할 동리가 없어지면 인자가 올 것입니다. 인자가 오시면 공의의 심판이 내려질 것입니다. 의인에게는 후한 상급이 있고, 악인에게는 마땅한 형벌이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기 때문에 신자는 땅에서 쫓기고 공격당하고 패배를 달게 참습니다. 버림받고 누명을 쓸 때도 참고 견디라, 빗발치는 돌무더기 속에서도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 결코 저주하지 말라. 순한 어린 양같이 저항하지 않고 평화를 사랑하는 자는 최후의 승리를 거둡니다. 앞서 읽은대로 누가 승리했습니까 이삭을 쫓아내던 아비멜렉입니까 쫓기며 다시 우물을 갈아 팠던 이삭입니까 이삭의 인애, 관용, 사랑이 최후의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도 참기 어려운 일에 세 번만 우물을 갈아 파는 용기를 가져봅시다. 그러면 그곳이 르호봇 “ 믿음의 광장 ” , “ 평화의 광장 ” 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인내하는 마음으로 항상 승리하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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