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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이 받은 위로 (고후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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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육체가 언제나 편치 못해 5절에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하였습니다. (1) 육체가 글 편치 못한 이유들 사방으로 환난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마게도냐에 이그렀을 때에도… 라는 말은 그가 드로아에서 고린도 교회로부터 온 디도를 기다리다가 마게도냐로 왔는데 아직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못들어 마음이 개운치 않은데다가 엎치고 덮친 격으로 마게도냐도 역시 새로운 환난을 당하게 된 것이니 바울은 하루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본문에 육체가 편치 못하다는 말은 신체의 질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의 심리상 불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편치 못하니 자연히 육체도 편할리가 없었습니다. 그것도 간 데마다 수없이 매를 맞아 멍이 들고, 육신의 상처가 부치는 데다가 또다시 새로운 환난을 마게도냐에서 당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이같이 만한 것은 결코 동정을 구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의 영은 이러한 육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몹시 담담하고 편안하였으니 그의 심적 평안은 그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2) 심적 고통이 있었다면 5절에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밖으로의 다툼은 바울이 어디서나 당하는 불신 유대인들의 핍박을 의미합니다. 안으로 두려움이라는 말은 고린도 교회의 내부에 있는 여러가지 문제로 인한 염려거리를 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내부 문제 때문에 어찌 될까 근심한 것은 사실입니다. 디도가 속히 왔더라면 고린도 교회의 편지를 받고 어떻게 반응을 나타냈을지 알아 시원스러웠을텐데 그가 지체하였으므로 고린도 교회를 위한 영적 염려가 그의 육체적 고통을 더하게 했던 것입니다. 성도 한 사람의 신앙적 탈선을 염려하는 바울의 참다운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3) 육체가 편치 못한 또 하나의 이유 사도 바울의 기도생활입니다. 그는 이같이 걱정과 염려, 그리고 환난을 당할 때마다 기도하기를 쉬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밤을 새워 기도하는 습성이 있었으니 곧 환난을 당할 때마다 하는 철야기도입니다(행 18장). 낮에는 장막짓는 고된 작업과 시간이 나는대로 전도생활을 하면서 기도생활과 성경공부 시간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행 17-18장). 그 외에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계속 교회를 염려하는 일로(고후 11장) 그의 심신은 극도로 피곤하여 편한 날이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의 위로 6절에서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가지 육적, 심적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러나 그는 그런 위태한 때에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1) 환난과 주의 위로는 정비례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환난에 정비례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가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환난이 없으면 주의 위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사실 환난과 시험이 없으면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위로의 진미도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시 119:7에 보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습니다. (2) 환난과 위로는 비교가 안됩니다.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그것이 아무리 혹독해도 인간 수준의 것이요, 위로는 그것이 하나님 수준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하나님의 위로가 충분히 위로하고도 남는다는 결론이 됩니다. 위로못할 환난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이같은 하나님의 위로를 아는 성도는 닥치는 환난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롬 8:35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3) 바울은 본문에서 자기를 비천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천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베냐민지파로 귀족 출신이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당시의 지식인이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요, 랍비요, 정평있는 바리새 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요. 죄인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딤전 1:15). 그도 역시 지칠 때는 육체가 편치 못했고, 또 하나님의 위로가 없이는 감당치 못할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늘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적절한 주의 위로 7절에서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하였듯이 디도가 고린도 교훈에 가서 바울의 지시를 말했을 때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교회가 선한 교역자의 지도대로 순종하는 것만으로도 기쁜 일인데 그 이상으로 지도하여 주는 교역자를 위로하며, 받들어 주며, 더욱 같은 방향으로 힘쓰도록 밀어주는 것을 볼 때에는 그 기쁨이 말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1) 디도의 도착 우선 디도가 밝은 얼굴로 자기에게 온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는 마치 그가 고린도 전도시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 온 것으로 인해 용기백배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던 것과 같습니다(행 18장). 동역자는 외로운 처지에서 얼굴만 마주 쳐다보아도 힘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둘씩 둘씩 짝지워 전도하러 보내셨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안디옥 교회에서도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을 짝지워 선교에 이바지하게 했던 것입니다(행 13장). (2) 디도의 보고 디도에게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회개를 보고받자 크게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다고 했으니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지시한대로 부조리를 시정했기 때문입니다. 이 보고가 바울의 괴로움을 말갛게 가시게 했던 것이며, 어려움을 이기게 한 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 역시 동역자 디도로 말미암아 적절한 위로를 받게 되었으니 이는 교역자가 흔히 자기 아내나 자녀, 혹은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어떤 사람을 통하여 주의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됨으로 새롭게 전진할 수 있을 때가 많은 것과 같습니다. “오늘은 내가 설교에 실패하였구나…” 할 때면 반드시 주께서는 어떤 사람을 통해서 오히려 은혜받았다고 간증케 하므로 주의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교인이 회개할 때가 제일 큰 위로입니다. 그것도 시정책을 제시했을 때 그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했을 때보다 더 즐거운 때는 다시없습니다. 바울의 일편단심은 오직 그들의 올바른 회개에 있었던지라 그들이 회개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하며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낙심할만한 때면 반드시 위로해 주시며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제는 죽었구나(고후 1:3-11)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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