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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비와 위로 (겔 11: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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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백성이 자기들보다 먼저 사로잡혀 가는 동포들을 향하여 하는 말이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얼마나 그들이 강퍅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서는 그들보다 먼저 사로 잡혀간 백성을 돌보시고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백성을 가리켜 좋지 못한 무화과라하고, 그들보다 먼저 사로 잡혀간 자들을 좋은 무화과라고 비유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은 아직 그 성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을 황송하게 생각하고 회개했어야 될터인데, 도리어 저렇게까지 무지하게 교만하여진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먼저 사로잡혀간 자들을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으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잠간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되어 있을 동안을 가리킵니다.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이 말씀은 실상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강퍅한 유대인들의 사상을 깨뜨리는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다만 예루살렘 성전만을 의지하고 헛된 안전감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군대가 멀지 않아 침략하러 온다는 예레미야의 말씀을 듣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성전 때문에 바벨론 군대가 올 수 없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렘 7:4). 그리고 예루살렘에 잔류 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동족들에 대하여 침략자들에게 굴복한 변절자로 간주하여 종교적, 국민적 권리를 박탈했습니다(15절).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만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16절에 하나님은 당신이 계실 성소를 당분간 바벨론으로 옮기시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1. 예루살렘에 잔류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형제를 멸시함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유대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되어 간 자들에게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고 하면서 멸시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은 자기들의 하나님이라고 자랑하며 교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되어 간 유대 백성을 좋은 무화과라 하였고 유대에 납아 있는 자들은 좋지 못한 무화과라고 하였습니다(렘 24:2-7).

2. 하나님의 위로 16절에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성전 없는 바벨론에서라도 하나님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백성에게 영적 성전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정한 장소에 매이지 않으시고 어디서든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찾는 백성에게 계셔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신약 운동의 준비라 하겠습니다(요 4:24).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성전이 없는 바벨론에 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은 곧 파멸될 것이었습니다. 왜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겠습니까 (1) 예루살렘의 타락성 때문입니다. (2) 바벨론 포로의 유대인들의 경건성 때문입니다. 에스겔보다 먼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던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을 열어 놓고 하루에 3번씩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경건한 자들이 포로된 유대인 중에는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처소를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3) 그것은 하나님의 무소부지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에스겔의 환상에서 “성소”에 대한 개념의 큰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다니엘의 성소개념이 전통적이며 폐쇄적이며 폐쇄적인 유대 백성들의 성소에 대한 생각이라면 에스겔의 “성소”개념은 예루살렘과 성전이 훼파되었을 때 하나님 부재의 신앙적 공백을 충족시킬 수 있는 진보적이며 개방적인 성소 개념입니다. 이런 성소 개념은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고백하는 가운데도 나타나 있습니다. 창 28:17에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 때부터 섬겨오던 브엘세바 제단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줄 알았으나 벧엘 광야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성전 안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은 언제나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유대 백성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것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는 것이 영적으로 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멍에를 메라고 명령할 때 괴로워도 순종해야 복받습니다. 그 멍에를 멜 때 낮아지게 되고 회개하게 되고 영적 성소를 발견케 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신령한 생명의 역사가 있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비록 보이는 성소는 떠났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메워 주신 멍에를 메는 자에게 참성소가 되어 주시고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성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배하는 곳에 같이 하십니다.

3. 유대의 회복 (1) 유대의 회복 17-18절에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서 모으며 너희를 흩을 열방 가운데서 모아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하라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 모든 미운 물건과 가증한 것을 제하여 버릴지라”고 했습니다. 열방의 포로가 되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으로 성소를 삼는 유대 백성을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들이 유대 땅으로 돌아오게 할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미운 물건과 가중한 것을 제하여 정결하게 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 왕국의 회복만이 아니라 유대 민족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대 나라는 예루살렘 성이 불탐과 함께 사라졌지만, 이 사라진 왕국은 메시야에 의하여 영적인 왕국우로 다시 태어날 것이므로 그 민족의 회복만은 반드시 이루어져 야만 했습니다. 메시야를 출산한 민족은 언약의 백성인 유대 민족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2) 유대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19-20절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쫓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열방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영적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일치한 마음, 즉 새 마음을 주고 또 그 속에 새신, 즉 성령을 부어주어 돌 같이 굳은 마음이 살 같이 부드럽게 되어 새 운동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유대 본토로 돌아가는 운동의 요점도 단지 육체적 행복을 회복함이 아니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영적 광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 것만이 그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축복인 것입니다. 아니 그 보다도 전인류에게 축복인 것입니다. 유대국은 솔로몬 이후 분열된 나라로 북조는 이스라엘, 남조는 유대였으나, 70년 바벨론 포로시에 하나로 통합되었습니다. 그 후 바벨론이 패망하고 바사제국이 패권을 장악했을 때 고레스 왕에 의해서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포로 중에 분열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하나로 통일시켜 새유대 백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3) 유대 인을 포로에서 귀환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21절에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좇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은 우상숭배라 하나님이 미워하는 모든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죄를 짓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 행위대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겸손히 회개하며 미운것과 가증한 행위를 그치고 모든 죄를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깨어져 나가고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생명과 구원이 되어주십니다. 따라서 우상을 섬기는 자에게 벌할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믿는 자에게 은총이 약속되었으면 악한자들은 구별하여 그 귀한 은총을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은총을 받지 못한 자는 평화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됩니다. 1) 은총에 제외된 자들은 마음이 미운 것들의 마음을 좇는다고 했습니다. 마귀가 예배를 받으려고 애쓰듯이 저들은 마귀의 예배를 받으려고 애씁니다. 저들은 우상의 마음을 좇는자들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질로나 행실로나 저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과 같으며 그들에게서 잔인성과 조잡성을 배웁니다. 여기에 바로 저들의 모든 악의 뿌리, 마음의 부패의 근원이 있습니다. 2) 저들의 운명은 정의의 공포를 수반합니다. 21절에 “내가 저들의 행실을 저들의 머리에 보상해 주리라”고 했습니다. 저들의 행실에 따라 대우하신다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잘 말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것보다 죄인의 비극을 더 잘 말해주는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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