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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금 방패와 놋 방패 (왕상 14: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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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호보암의 종교적 정책은 단이나 벧엘보다는 예루살렘의 성소에 중점을 두었고 소의 형상의 사용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을 제하면 그의 아버지의 시대보다 더 전진이 없었고 본질적으로 여로보암의 우상숭배와 다른 것이 없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유다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여전히 지방의 (산당들)에서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예배와 바알의 예배를 구별하기 어려웠을 만큼 옛 가나안 신들의 영상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 사람들은 거치른 돌기둥과 아세라 목상들과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물려받은 거룩한 나무들을 예배하는 것을 계속했습니다. 옛 가나안 종교의 가장 불쾌한 특색은 정상적이거나 비정상적이거나 병적인 성행위의 격려였습니다. 그것은 나라의 풍부를 고무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맹렬하게 투쟁하였고, 요시야의 개혁으로 산당을 철폐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성전에서만 여호와의 예배가 허락 되었습니다. 르호보암의 통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외부적 사건은 애굽 왕조의 최초의 통치자 시삭에 의한 침략이었습니다. 그는 히브리 사람들의 분열된 약점을 이용하여 그들의 땅을 침입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과 레바논의 나무로 지은 궁으로부터 금 방패를 모두 약탈해 갔습니다. 시삭이 약탈한 예루살렘 성전의 금 방패는 솔로몬 왕국의 시들어 가는 영광의 상징이었습니다. 본문은 유대 왕 르호보암 때에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솔로몬 왕이 제조한 대 소 금 방패를 다 빼앗아 가자 그 대신에 놋 방패를 만들어 왕궁 문을 지키는 시위대 장관에게 붙여준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받는 교훈이 있는 줄 압니다. 르호보암은 명성이 높은 왕이 아닙니다. 르호보암은 한편으로는 솔로몬 왕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자신의 정치적인 실책으로 인하여 국가적 권위와 특권을 추락시킨 정치적 실패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죽자 그는 젊은이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솔로몬 때보다 더 과중한 짐을 지우고 그들을 엄격히 다스리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왕국의 절반 이상을 상실하였습니다. 오직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이 다윗 왕가에 계속 남아서 충성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그의 작은 왕국마저 애굽 왕 시삭에게 침입 당하여 모든 금패물을 약탈당한 것입니다. 이제는 솔로몬 당시에 보이던 금 방패는 보이지 않았고 놋 방패만이 남게 되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갈 때마다 그의 시위병으로 하여금 놋 방패를 들고 가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부친의 금 방패를 다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그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고 공식석상에 놋 방패를 들도록 하고 그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르호보암은 그의 통치초기에 혼란을 가져왔으며 번복할 수 없는 정치적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웃의 애굽 왕 시삭에게 너무 약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 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아직도 충성을 다하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있었으며, 그들은 그가 그들의 통치자로 남아 있기를 원하였습니다. 르호보암은 그의 부친 솔로몬이 누렸던 것과 동일하게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유다 지파에게 가능한 한 큰 존귀와 위엄을 부여하고자 하였으며, 비록 금 방패 대신 놋 방패 밖에 지니지 못하였으나 그의 아버지 솔로몬이 취했던 동일한 위엄을 지니고 하나님의 전에 나가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같이 위엄 있게 다스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이제 금방패가 아닌 놋 방패를 들고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같이 사람은 놋 방패를 가지고도 그 자신이 사회적 책임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르호보암이 취했던 처사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일은 르호보암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처사를 조롱하고 비웃었을 것이며, 예루살렘 사람들은 르호보암에 대해서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가 지남에 따라 예루살렘 사람들은 르호보암의 놋방패에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르호보암의 통치가 하향 길을 내딛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파멸의 종착역에 이른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윗 가문의 왕좌를 포기하지 않고 그 왕좌를 계속하여 지켜 나갔습니다. 그 누구도 르호보암을 탁월한 성공을 거둔 자로 칭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끝까지 신실하게 왕으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수행 하였으며,그의 아들에게 불명예스럽지 않은 왕좌를 물려주었습니다. 아마도 이 놋 방패는 완전히 파멸되기를 거부하였던 르호보암의 불굴의 투지와 위엄과 결부되어 국왕의 권위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한 때 열 두 지파를 지배하였던 사람이 두 지파만을 다스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금 방패를 지니고 있던 사람이 그 금 방패를 빼앗긴 후에 놋 방패로 그것을 대치시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르호보암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투쟁하여야만 했을 때 매우 괴로운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아직도 많은 세월이 있었으며 그는 그의 나머지 백성들에게 왕으로서의 직무를 다하지 않아도 좋다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의 그릇된 의견을 따름으로 인하여 실패를 당하고 자신의 높은 지위를 상실했으면서도 그들 자신의 생애의 흩어진 조각들을 취하여 끝까지 신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갔던 사람이 바로 르호보암 이라고 생각됩니다. 역사는 그들을 위하여 승리의 우렁찬 나팔 소리를 내지는 않습니다. 르호보암 시대에는 솔로몬시대보다 보잘 것 없었지만, 그러나 왕으로서의 권위를 지켜나가는 데는 비범한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르호보암이 금 방패를 다 빼앗기고 그 대신에 놋 방패를 만들어 왕궁 문을 지키는 시위래 장관에게 붙여준 사실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여기서 영적으로 깊이 배울 점이 많은데, 금 방패는 곧 금 같은 신앙(엡 6:16)인데 일반 우리 신자들이 금 방패로써 악마의 화전을 막아가며 선한 싸움 곧 신앙의 싸움을 싸우는(딤전 6:12) 중입니다. 그런데 이 금에 대하여 두 가지 있으니 첫째로 금은 신성을 표시한 것입니다. 곧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갈 2:20)이니 이는 곧 큰 방패입니다. 둘째는 불같은 시험을 잘 싸워서 이긴 신앙(벧전 1:7)이니 이는 곧 작은 방패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이 크고 작은 방패를 가지고 저 애굽 왕 시삭의 형(型)인 악마와 더불어 싸우는 때이므로 방패가 만일 금이 아니면 더 힘이 센 악마의 화전을 도저히 막지 못할 것입니다. 이 때 르호보암이 큰 방패 200개와 작은 금 방패 300개를 시삭에게 빼앗기고 놋으로 방패를 만든 것 같이 현대의 신자들이 저 솔로몬의 형(型)되시는 예수께서 주신 순금의 방패 곧 오래고 귀한 믿음을 저 시삭같은 악마에게 빼앗기고 그 대신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아니하는 소위 현대의 신앙을 가진 자, 곧 놋 방패를 가진 자들이 있습니다. 대저 놋이라 하는 것은 아연과 동을 혼합하여 만든 것인즉 순결하지 못한 세속적 신앙 곧 정치, 철학, 과학 같은 것들로 섞어서 만들어낸 인위적이요 또는 문명적인 신앙으로 얼른 보면 순금 같으나 오래지 않아서 그 색깔이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방패는 무슨 방패입니까 금입니까 놋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방패가 무엇인지 구별하기 어려우므로, 첫째는 어떤 것이 금이며, 어떤 것이 놋인지 잘 분별하시는 하나님의 신을 힘입어야 하겠고(요 1서 4:1). 둘째는 초와 불로써 시험하여 분별하여야 하겠습니다. 대개 금은 초를 발라도 그 빛이 일절 변하지 않고 또 불에 던져도 그 빛이 변치 아니할 뿐 아니라 도리어 더욱 빛을 발하며 가치를 더하지만 놋은 그렇지 아니하여 초를 바르거나 불에 넣으면 곧 변하는 것 같이, 금 같은 신앙은 불같은 박애와 초같은 비난을 당하여도 변하지 않고 더욱 견고해지지만, 놋 같은 신앙은 박해는 그만 두고 약간의 비난만 하여도 그 색채는 곧 변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간의 비난이나 혹한 박해를 당한다 하더라도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이 금 방패를 굳게 잡고(계 2 ; 25)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끝으로 르호보암이라는 뜻은 “백성을 만연케 하는 자” 라는 것입니다. 이 이름과 같이 오늘의 교역자들이 자기 교회 신생자와 성결한 자가 있고 없음을 불구하고 다만 그 백성의 만연, 곧 신자 수효만 증가케 하기에 급급한데 이는 곧 르호보암의 정신입니다. 누구든지 이러한 정신이 있으면 그것은 곧 금 방패를 빼앗길 장본인입니다. 한 두 개의 금방패가 비록 소수이지만 저 천만개의 놋 방패보다 예수님의 앞에서 더 많은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누구나 다 금 방패를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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