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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욥의 절망 (욥 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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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욥이 자신의 비참을 탄식함(1-2절) 1절에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구나”라고 했습니다. 욥은 이제 친구들에게 조차 위로함을 받지 못했고 전능자를 향해 간구하였으나 여전히 침묵 가운데 계시므로 자신의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땅에 아무런 소망이나 미련을 가질 수 없기에 이제 자신의 비참함을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영계를 깨닫게 해달라고 호소함(3-5절) 이 문제를 계속 논의하는 것은 욥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보증할 수가 없었습니다(3절). 욥은 절망적으로 묻고 있습니다. 4절에서 욥은 자기 친구들도 자기와 다투어 결코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욥에게 고통을 준 하나님께서 이제 서서히 그 친구들에게도 고통을 가지고 방문하려고 출발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5절에서 욥은 친구들과 다투듯이 심한 저주와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본문에서 욥은 하나님에게 보증물을 달라(3절)고 호소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신약시대와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믿는 선조들에게 증거를 많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이 하늘에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아질 것을 약속하시고 그대로 섭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홍수심판 후 무지개로 평화의 증거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구약시대는 부분적 증거를 많이 주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증거는 내적인 것입니다. 과학이나 철학의 증거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성경의 증거로 믿습니다. 요 20:27에 도마에게 손으로 만져보고 믿으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9절에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했습니다. 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성령의 증거로 믿게 됩니다. 요일 5:7-8에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이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니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고 했습니다. 내세의 기업을 성령의 증거로 믿습니다. 지식에는 직관적인 지식과 공부해서 아는 일반적 지식이 있는데, 직관적 지식은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깨닫지 못합니다.

3. 수난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함(6-10절) 욥은 결국 아첨으로 그를 속이는 것보다도 오히려 그들이 생각한 것을 말하는 것이 더 낫다고 신중히 생각했습니다. 욥은 고통과 슬픔으로 인하여 그의 눈은 어두워졌고 너희 중에 지혜자를 찾을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욥은 모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기는 완전무결하다고 하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인데 이것이 분명히 욥의 또 다른 극적인 비약을 나타내는 놀라운 점임에 틀림없습니다. 10절에서 욥이 그의 친구들을 다시 오라고 부탁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들은 욥의 그 대담한 신성모독에 충격적인 항거를 했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6절에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라고 했는데 이는 인격에 모독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법정에서 침 뱉음을 당하는 인격적 모욕을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4:9-13에 “내가 생각컨데 복음 때문에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며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수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거기 같이 되었도다”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 50:6에 “나를 때리는 자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7절에 “내 눈은 근심으로 인하여 어두워진다”라고 했습니다. 많은 근심을 가질 때 눈이 어두워집니다. 8절에 “정직한 자는 놀라고 무곡자는 사곡한 자로 인하여 분을낸다”라고 했습니다. 9절에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도다”라고 했습니다. 의롭게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서 욥은 의를 지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4. 죽는 날은 경영이 끝나는 날(11-16절) 우리는 서서히 욥이 탄식하며 몸부림치기를 멈추고 안식의 곳으로 가고 있음을 봅니다. 11절에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경영 내 마음의 사모하는 바가 다 끊어 졌구나”라고 했으며, 13절에 “내 앞에는 단지 무덤만이 있을 뿐 나는 나의 침상을 흑암에 베풀었도다”라고 했고, 16절에 “내 어미, 내 자매 흙 속에서 쉬는구나”라고 조롱할지라도 인간은 속한 존재임에 틀림없다고 탄식합니다. 그가 그의 출생부터 타락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결론으로 11-16절 말씀에는 엄연한 현실과 친구들의 천박한 현실 판단이 생생하게 대조되어 있습니다. 친구들은 밤을 낮이라고 선포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친구들은 진리를 뒤바꾸어 놓았다가 분명한 어두움을 어두움이 아니라고 우긴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친구들은 이제 욥에게서 어둠이 지나가고 새벽이 오리라고 하지만 오히려 그것과 정반대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엄연한 현실은 욥의 상태가 새벽을 향한 자세가 아니라 죽음의 암흑과 음부, 곧 스올을 향한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은 자신의 힘으로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본문 13-16절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생에 대해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도모는 모든 것이 다 허사라는 것입니다.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으며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생명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소망이요 생명이시므로 항상 우리 가운데 거하시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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