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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강한 자와 약한 자 (고후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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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전후서에서는 역설적인 명언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가령 고전 1장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고전 1:27)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지혜와 어리석음 사이에 벌어지는 역설을 논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합니다. 강자와 약자간의 역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 어떤 나라에 아주 비겁한 무사가 있었습니다. 전쟁에 나가면 무서워 감히 싸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어디 가서 숨어있다가 오기 때문에 친우들에게 늘 조롱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한번은 그가 우연히 전장을 홀로 가다가, 화살에 맞아 거의 죽어가는 적을 만나 그 목을 잘라 들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의외로 적의 아주 유명한 장수였습니다. 그래서 비겁한 무사는 일약 용감한 무사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후 그는 정말 용감한 무사가 되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앞서 달려가서 큰 무공을 세우곤 하였다고 합니다. 약자가 강자가 된 극적인 사건입니다. 아마 이와 반대로 강자가 약자가 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강자의 무용담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성서는 삼손의 힘 자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장군이었습니다만 어릴 때 사자와 곰을 이긴 것을 보면 힘이 세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중국의 향우가 힘도 세고 고집도 세었다고 합니다. 헬라 신화에는 헤라크레토스가 힘이 장사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현대에서는 개인적이기보다 국가적인 장사를 말하며, 혹은 4강이니, 혹은 5강이니, 또는 초대강국이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고 있는 강자와 약자의 개념은 위와 같은 유적이거니와 추가적인 것에 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신적이며 내적인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어린이나 노약자나 병자까지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강자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중요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내적 강자가 되는 일로 생각합니다. 이제 성서의 교훈을 따라 참된 강자의 모습을 살펴 보십시다.

1. 먼저 강할 때에 곧 약함이라는 사실을 살펴 보십시다 즉 약할 때에 곧 강하다는 것을 반대편으로 생각할 수 있고 그 반대편을 바로 알아야 이 사실도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바울 자신도 이전에는 강자였습니다. 강자로서 많은 사람을 두렵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헬라 사회에서는 지혜있는 자가 강자였습니다. 로마에서는 군사적 영웅이 강자였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율법에 충실한 자가 강자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 어릴 때부터 율법에 통달했으며, 유명한 랍비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율법에 충성을 다했으므로 민중에게 강자로 등장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배경까지 빌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투옥하고 죽일 때 앞장서는 강자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인즉 이렇게 강할 그 때가 바울에게는 위기였습니다. 무서운 과오를 범하는 약자였습니다. 후일에 그 자신이 딤전 1:13에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였으나”라고 고백한 것을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폭군 네로가 베드로나 바울을 죽인 때는 주후 65년경이었습니다. 베드로나 바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을 기둥에 묶고 몸에 기름을 발라 태우며 그 불빛 아래서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AD 68년에 자기의 몸에 불을 질러 자살하였습니다. 불과 수년 후에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을 미리 알았다면 그는 그런 폭정을 감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네로의 본성을「우울」이라고 하였듯이 가장 강하게 보였을 그 때에 네로는 오히려 약했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멸망의 씨앗을 뿌리고 패망의 무덤을 팠던 것입니다. 독일의 히틀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동베를린에서 히틀러가 그의 애인을 죽이고 자살하여 죽은 지하실을 보았습니다만 독재자의 최후에 숙연해졌습니다.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하고 수백명의 목사를 죽였으며 교회를 박해했던 그였습니다. 만일 그가 자신의 비참한 최후를 10년 전에만 알았던들 그런 무모한 범죄 행위는 못했을 것입니다. 가장 강할 그때에 그는 약했던 것입니다. 결국 위와 같은 예에서「강함」이란 육적 강함을 말하고「약함」이란 정신적 약함을 말합니다. 현대는 전체적으로 육적으로는 강하고 정신적으로 약한 때와 같습니다. 현대는 육적, 또는 외적으로 일찌기 전례가 없이 강할 때입니다. 대량 생산을 통해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례 없는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열강들이 가진 군비는 무서운 것입니다. 가지가지의 오락 시설들을 통해 인생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의 정신상태는 전례 없이 연약한 상태에 있습니다. 거의 생의 이념과 철학을 잃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약해지고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현대를「후 그리스도교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현대인의 정신적 약점은 두 가지 원인에서 온다고 생각됩니다. (1) 물질적 번영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입니다. (2) 현대인은 너무 분주합니다. 미국에서 교포 교인을 만났는데 몇 시간도 조용히 얘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모두들 바쁜 근무 스케줄이 있어 말하는 도중에 자리를 뜨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현대인은 너무 바쁘고 시간에 쫓겨 조용히 자기의 믿음을 돌보고, 기도하며, 성경을 묵상하는 시간을 얻지 못하는 듯합니다. 이와 같이 분주한 생활에서 육신은 살찌고 강해지지만 영혼은 야위고 약해지고 있습니다.

2.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십시다 제 2세기의 바울전에 의하면 바울은 키가 작고 머리는 벗어지고 다리는 굽고 눈썹은 서로 붙어 있으며 긴 코를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하여튼 그의 풍채는 좋지 못하여 육적으로는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기에 알맞은 몸이었습니다. 고후 12장에는 바울이 하나님이 계시는 낙원에 올라가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통 바울의 신비주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최고의 영적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 육체적으로는 육체의 가시 곧 어떤 난치의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난치병 때문에 복음 전도 생활에도 여러 가지 지장을 초래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 병이 낫기를 위해 세 번이나 주께 간구하였으나 주님의 응답은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영이 강할 때 육신이 약하였고, 육신이 약함으로 그의 영은 더욱 강하게 된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도 그런 것 같습니다. 가령 애굽의 역사를 보면 함파의 왕조가 번영할 때 향락에 흐르고, 약해졌을 때 동방이 샘족에게 침략당하여 그들에게 왕권을 빼앗겼습니다. 요셉이 총리대신 되던 때도 바로 이 샘족의 왕조 시대로 봅니다. 그후 셈파 왕조도 사치에 흘러 옛 무용을 잃어버린 후에 남방으로 추방된 것입니다. 하여튼 강자는 약해지고 약자가 강해지는 것은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가 봅니다. 사람이 자기 부귀나 권세나 지식에 도처해서 강자로 자처할 때가 가장 위험한 약자라고 앞서 지적했습니다만 반대로 자신의 약점을 느끼며 두려워 할 때가 사실인즉 강한 때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연약한 갈래라고 하였습니다. 괴테는 자기가 두 혼을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을 이중인격자라고 저주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사람은 모두 육적으로, 또 영적으로 자신의 약함을 통감한 분들입니다. 성서가 말하고 있는 강자와 약자의 개념은 위와 같은 유적이거니와 국가적인 것에 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신적이며 내적인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어린이나 노약자나 병자까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강자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중요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내적 강자가 되는 일로 생각합니다. 이제 성서의 교훈을 따라 참된 강자의 모습을 살펴 보십시다.

3. 강한 자 안에서 강한 자가 있습니다 무조건 약한 자나 강자가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폴레옹의 생은 실패로 돌아갔고, 바울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자신을 의지한 자는 망하였고, 주님을 의지한 바울은 승리를 한 것입니다. 여기 종이 한 장이 있습니다. 종이 자체는 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종이를 철판에 불이면 종이를 못찢습니다. 구멍을 내지 못합니다. 철판의 힘을 빌리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는 약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품에 있을 때는 절대 안전합니다. 어머니의 능력이 자기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여성은 약하나 남편과 함께 있을 때 강해집니다. 사람은 빨리 날지 못하나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 높이 빨리 나를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영아들이 태어날 때에는 두 팔과 두 다리를 오그리고 열 손가락을 움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이를 해석하기를 어머니의 태를 그리워하는 동작이라고 합니다. 영아를 위해서는 모든 조건이 완비되어 있는 어머니의 태에서 거치른 세파에 내던져졌을 때 본능적으로 그 안전지대를 그리워하고 그리로 돌아가려는 동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안전지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절대 강자가 될 수 있는 지대입니다. 저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전성기에 의회정치 본거지인 국회에서 있었던 한 가지의 얘기를 읽었습니다. 한창 국사를 논의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폭풍이 불어오고 하늘의 기상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이 광경을 본 한의원이 일어서서 “아마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모양입니다. 우리 국회를 정회하고 각각 집으로 돌아가서 주를 맞이할 준비를 하십시다” 하였습니다. 그때 다른 의원이 하나 일어서더니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국사에 충실 하는 것을 더욱 기뻐할 것입니다. 이대로 국사를 논의하다가 주를 맞이하십시다”하였습니다. 결국 후자의 의견이 수락되어 경건한 모습으로 국회를 계속했다는 얘기입니다. 만일 오늘 한국 국회 의사당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면 조롱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영국 국기 유니온 젝크기가 휘날리는 곳에 해지는 곳이 없다고 최강대국으로 자랑했습니다. 우리는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참뜻을 구별해야겠습니다. 주 안에 있으면 진정 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항상 주 안에서 승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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