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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 (마 06: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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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살기 위해 허덕이는 우리를 향하여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어두운 현실에서 눈을 돌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생활 문제, 의식주 문제 때문에 지치고 지친 가난한 무리를 향하여 주님께서는 빵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주시지 않으시고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인류 문화와 문명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솔로몬의 그 모든 영광도 이 들에 핀 한 송이 꽃만 못하다고 하십니다. 자연은 생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우리 인간들의 어진 스승입니다. 자연은 인간들에게 창조주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그의 지혜와, 그의 재능과, 선하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우주적인 대 진리와 철학, 과학, 생리학 등에 대하여 웅변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위대합니다. 지구의 직경이 1

2.756 km인데 태양은 지구의 130만배이고, 직녀성은 태양의 27배입니다. 이렇듯이 엄청난 별들이 허공에 떠있어 회전하면서 그 궤도 안에서 억만년 변함이 없습니다. 이 지구 표면에서 성장하는 60만 종의 식물들과 25만 종의 동물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어떠한 풀 한 포기나 꽃 한 송이에서 진, 선, 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거기에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나 그의 재능과 그의 선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인간이 자연의 스승에게서 배울 것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우리는 자연에서 침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자연은 말이 없습니다. 자연은 방언을 받았다고 떠들지도 않지만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시 9편에 보면 자연은 소리가 없지만 그 소리는 온 땅에 통하고 침묵의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헬라사람은 사람이 동물보다 귀하여 사람은 이성과 언어를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신앙 생활에 있어서 무거운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고요한 음성을 듣는 기도의 생활이 필요하며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곧 듣는 데서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어깨를 겨누며 말할 수 없습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나는 듣겠나이다 하는 고백만이 참다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2. 우리는 자연에게서 복종을 배웁니다 자연은 복종의 스승입니다. 자연은 아무런 불평 불만없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말없이 복종합니다. 그 길고 긴 장마철에도, 숨막힐 정도의 무더운 삼복 더위에도 찬 이슬이 내리는 쓸쓸한 가을에도, 그리고 눈보라치는 엄동설한에도 자연은 말없이 하나님께 복종할 따름입니다.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백합화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거나 말거나 자연은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불평이 없습니다. 자연은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인간처럼 생의 불안에서 고독과 허무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기 때문이며 자연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위대한 복종의 스승입니다.

3. 우리는 자연에서 삶의 기쁨을 배웁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는 우리에게 삶의 기쁨을 가르쳐 주는 스승입니다. 저들은 내일의 운명을 모릅니다. 내일 아궁이에 던지울 수도 있으며, 공중에서 기뻐 노래하던 새들은 사냥꾼의 총이나 사나운 날짐승의 습격 때문에 생명의 종말을 고할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오늘 주어진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버리지 않습니다. 저들은 내일 염려 때문에 오늘의 삶을 등한히 하거나 괴로워 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주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고 모든 것은 주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자연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만 공연히 내일 일을 염려하고, 슬퍼하고, 울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자연은 인간들의 표리부동과 변화무상함을 비웃고 있습니다. 산을 보아도 믿음직하고 바다를 보아도 공정합니다. 바위도 불변이고, 풀잎도 진실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인간만이 조석으로 변합니까 자연은 인간들의 비윤리적 행위를 책망합니다. 까마귀의 반포지도(反鋪之道)는 영원불변입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효도라는 술어까지 외면합니다. 효도는 시대를 착각함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개미는 겨울 양식 준비에 바쁘고, 근면하지만 인간만은 놀기를 좋아하고 자기의 천직 사명에 부실합니다. 벌은 언제나 질서정연하지만은 인간의 사회만은 혼란과 무질서에 빠지고 있습니다. 자연은 성도들의 믿음이 약한 것을 책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적게 믿는 자들아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자연은 허영에 빠진 인생들을 책망하십니다. 벧전 1:24에 “인생은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약 1:11에는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가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하였습니다. 인생은 저 풀과 같고 저 꽃과 같음을 느끼어야 합니다. 풀이 시들기 전에 꽃이 떨어지기 전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를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피조물로써 올바른 태도인 것입니다.

4. 우리는 자연에서 하나님의 섭리, 뜻, 영광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우상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예술, 타종교 등 자연에서 구원의 신의 따뜻함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큰 오산인 것입니다. 자연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구원을 주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분! 짐승같은 야만인 빌라도의 입을 통해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라고 놀라움의 고백을 하게 한 파격적인 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약육강식하는 어두운 자연계에서 침묵과 복종과 기쁨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신이 아닙니다. 자연은 단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종일 죽을 지경에 빠지며, 도살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으나 환란과 곤고, 핍박과 기근, 적신, 위험과 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담하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찬송하며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분을 믿는 사람은 가난한 것 같으나 실상은 부요한 자요, 가련하고 슬픈 자 같으나 실상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도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 최후의 적인 죽음도, 찌르는 가시도, 주님 앞에서는 절대성을 잃고 말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먼저 예수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삶의 중심이요, 내 생의 의미이며 흥망성쇠하는 어두운 세계사의 중심입니다. 이런 신앙적인 삶이 될 때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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