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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사장의 아들 예레미야의 소명 (렘 01:1-19)

첨부 1


예레미야는 실로 비극적 비애의 사람인 동시에 또한 정복할 수 없는 희망의 사람입니다.

1. 예레미야의 생애 (1) 생애 예레미야의 뜻은 "여호와께서 세우시다"란 뜻입니다. 예레미야란 이름을 가진 분이 성경 중에 선지자 예레미야 외에도 여덟 명이나 됩니다. 그의 고향은 아나돗, 부친의 이름은 힐기야로, 그는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 20여세의 젊은 나이로 선지자로 소명을 받아 50년을 봉직한 사람입니다. 그가 선지자 일을 보는 동안에 역대왕은 요시야 왕(렘1:2), 여호아하스 왕(렘23:31), 여호야김 왕(렘22:18), 여호야긴 왕(왕하24:6-15), 시드기야 왕(왕하24:17-20)등 이었습니다. BC 12년에 수도 니느웨가 함락되면서 앗수르는 망하고 바벨론이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예루살렘 왕실은 두 파로 나뉘게 되었는데, 친 바벨론파와 친 애굽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이나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2) 예레미야 활동의 시대별 구분 1) 요시야 시대 예레미야는 요시야13년(BC 627년)에 예언자로서 소명받았습니다. 그는 소명받을 때 예언자로서 성별되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변자가 되리라는 말씀을 들었으며 이와 더불어 신적인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의 초기에 예언의 특징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당시 만연되어 있던 종교적 부패와 우상 숭배에 대한 비판과 북방의 적에 대한 선포입니다. 2) 여호야김 시대 요시야가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한 후 여호야김이 집권한 유다는 암흑기를 맞이하였습니다. 므깃도의 전투에서 왕이 죽은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충격이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새롭게 떠오르는 세력인 바벨론의 위협이 유대를 괴롭혔습니다. 여호야김은 폭군이었고 따라서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상황에서 선지자의 비판의 소리는 날카로워졌습니다. 먼저 사치와 향락에 빠진 여호야김과 제사장들, 그리고 그들의 우상 숭배를 고발했습니다. 또 백성들이 성전을 단순히 공간적 도피처로 믿는것과 제사에 있어서 형식에 치우친 것들을 혹독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적 애가를 읊고 있습니다. 그는 조국의 현실 앞에서 무기력한 자신을 슬퍼하며 하나님의 부재의식으로 절망하고 또 용기와 동정과 적개심의 심한 감정적 변화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3) 시드기야 시대 갈그미스 전투에서 참패한 후 여호야김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당시 상황에 아무런 능동적인 대처도 할 수 없는 시드기야가 왕위에 올랐습니다(BC 598). 시드기야는 폭군도 아니었고 여호야김과 같이 우상을 섬기거나 사치스러웠던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기를 타개할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위에서 충돌질하는 의견들을 물리칠만한 주관도 없었습니다. 그는 생각없이 BC 59년의 바벨론에 대한 모반계획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예언자 선지자는 이 일에:대해서 예언하기를 자기 목과 똥과 멍에를 올려 놓은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 주권은 여호와께 있고 바벨론 마저 하나님의 도구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여 징계하려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깨달으라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런 선지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대를 포함한 군소 민족들이 바벨론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들은 엄청난 댓가를 치루었습니다. 바벨론은 BC 586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멸망을 앞둔 유대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시드기야에게 바벨론에 항거하지 말고 바벨론에 항복하면 왕도 살고 유대 나라는 식민지는 될지언정 포로로 끌려가지 않을 것이라 예언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백들과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반민족적인 것으로 생각되어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유대 멸망 후에 예레미야는 애굽에 끌려가서 그 곳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새 계약에 대한 예언을 했습니다.

2. 예레미야 시대 주요 사건 연대표 640-609 BC 요시야의 치세31년 627 BC 소명을 받았고 622 BC 성전에서 율법을 발견 종교개혁 612 BC 니느웨 함락 609 BC 므깃도 전쟁, 요시야 왕 죽음 609 BC 여호아하스의 치세3개월 609-598 BC 여호야김의 치세11년 605 BC 갈그미스 전쟁, 1차 포로 (다니엘 포함) 바벨론이 애굽을 대파 598-597 BC 여호야긴의 치세3개월 598-597 BC 바벨론의 2차 포로 만명이 끌려감 597-587 BC 시드기야의 치세11년 589 BC 예루살렘의 포위 시작 587 BC 성전이 불타고 예루살렘 성도 파괴됨 586 BC 바벨론의 3차 포로 예레미야가 속해 있던 시대는 진실로 그 비극이 절정에 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3. 예레미야의 신앙 성격과 메시지 (1) 예레미야의 신앙 성격 1) 일찍부터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젊어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경험을 통해서 렘애 3:27에 "사람이 젊었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라고 했습니다. 멍에란 섬기는 것과 고난을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19세의 젊은나이에 하나님 앞에 선지자로 부름받았습니다. 2) 오랫 동안 예언을 계속 했습니다. 혹자는 그 기간을 50년으로 계산하고, 혹자는 40년으로 계산합니다. 그는 요시야 왕 13년에 예언을 시작했고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 예언했습니다. 3)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그가 예레미야 애가를 기록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언제나 그 백성의 죄된 모습과 그들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에 대하여 애통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워집니다. 애 1:16에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라고 했고, 애 2:18에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라고 했으며, 애 3:48에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또 렘2:11에 그는 "눈물로 인해서 눈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성도의 눈물은 귀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오히려 소망이 있었습니다(렘30-33장). 히스기야의 눈물은 15년을 더 장수하게 했고(왕하20:6), 나인성 과부의 눈물은 독자를 다시 살렸습니다(눅7:13-14).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5:4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했습니다. 4) 고통의 선지자입니다. 우리가 예레미야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나라의 백성들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a 여화와의 집, 유사장 바스홀이 예레미야를 때리고 착고에 채워서 옥에 가두었습니다(20:2). b "이사람은 죽음이 합당하다"고 공갈 협박했습니다(26:11). c 요나단의 집을 옥으로 그 곳에 예레미야를 가두었습니다(37:15). d 시드기야 왕은 물 없는 진흙구덩이에 던졌습니다(38:4-6). e 애굽에 끌려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사야보다 1세기 후 므낫세 왕의 악한 정치 말에 태어나서(왕하23:26), 예루살렘 항복과(609년), 함락과(598년), 멸망의(587년), 처참한 광경을 친히 목도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자기 백성과 더불어 고난에 동참한 선지자였습니다. 5) 죄를 책망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곱의 자손의 죄를 고발하러 보냄을 받았고,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습니다. a 예레미야는 유대의 죄를 책망했습니다(3:6) b 제사의식의 죄를 책망했습니다(7-10장) c 예루살렘 성 내의 의인이 없음을 책망했습니다(5:1) d 우상 숭배를 책망했습니다(7:9, 11:13). e 유대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했다고 했습니다(17:1) 예레미야는 국가와 민족은 물론 열국의 죄까지 책망했습니다. 죄는 인간을 병들게 합니다.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죄는 마귀가 지옥으로 끌고 가는 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죄를 책망하는 것은 그 목적이 회개에 있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심령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2) 예레미야의 메시지 예레미야가 자기 백성을 위하여 한 봉사는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도 또한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한 위대한 예언자들의 계열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1) 말씀의 신학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대개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붙들려서 말씀을 받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경험하고, 또 하나님의 강권으로 선포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로 소명받은 후 그의 전생애를 걸쳐 하나님의 신탁을 운명적으로 선포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입술에 놓여 있었고 그의 말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의 예언 신탁에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보장된 권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의지와 상반될 때도 선포해야 했으며(렘28:6-7), 그는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말씀을 선포하지만 민족의 장래가 암담함을 알려야 하는 것 때문에 깊은 번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깊은 묵상과 호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의 관계를 알려줍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미리 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렘1:5)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권위를 둔 것이나, 심판에 대한 선포에서도 비록 그의 마음과는 정반대의 선포일지라도 번민 속에서 선포했던 것을 볼 때, 예레미야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단순한 관계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호세아 선지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결혼한 관계로 본 것이나, 솔로몬이 전도서를 통해서 부자관계로 본 것처럼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자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추수의 첫 열매, 순수한 포도 열매로 보았습니다. 한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우매한 백성들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그 날에는 모든 것이 용서되고 그 이상 문책을 받지 않으며, 그 날에는 빈부귀천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 때는 새 계약의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새 계약의 시대가 도래하므로써 완성되는 것입니다. 3) 계약 신학입니다. 예레미야는 출애굽의 전승에 대한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출애굽과 부족동맹의 이념에 끊임없는 희귀를 주장하므로써 자신의 계약 신학을 성립(렘14:21, 31:23, 11:3-8, 24:7)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계약을 맺은 백성이며, 그 계약 속에서만이 그들의 존재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불의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의에 충성하며 복종과 섬김, 그리고 감사와 즐거운 화해를 통한 동맹의 회복이 그들의 계약을 이행하는 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출애굽의 하나님 역사를 기억하였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식어갔고 가나안의 토속적인 우상 사상의 오염으로 이스라엘은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옛 신앙, 이스라엘의 청년기에 가졌던 신앙에로의 복귀를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우상 숭배죄는 하나님 앞에 희생 제사를 많이 드려도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바른관계를 재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선민으로서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계약조건은 만족되는 셈입니다. 예레미야의 계약 신학은 이들 계약의 조건성에 대한 만족과 신실성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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