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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리하는 삶의 요건 (왕하 06: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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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라고 말한 것처럼, 인생의 삶이란 연속적인 투쟁 속에서 부단히 전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삶의 투쟁 속에서 승리하는 생활의 비결을 알아야 합니다.

1. 영안으로 주의 역사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 나라를 여러 번 침략했으나 번번히 실패를 하고 나서 패전의 원인이 엘리사 때문임을 알고 도단성에 있는 엘리사를 잡으려고 군대를 보내어 밤중에 도단성을 포위하게 하였습니다. 도단 성민은 모두 두려워했으며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황급히 뛰어들어가 엘리사 선지자에게 “아아 내 주여 어찌하리이까”하는 절망적인 호소를 했습니다. 이 때 엘리사는 16절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하시며 태연자약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게하시는 아래만 보고 위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움에 싸였고, 엘리사는 영안으로 주의 역사하심을 보았기 때문에 태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 선지자는 하나님께 “종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게하시의 눈을 열어 보게 하셨습니다. 17절에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고 했습니다. 게하시는 신령한 눈을 뜬 다음에 엘리사의 말대로 자기들을 보호하고 있는 불말과 불병거의 수가 적군의 수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엘리사 선지가 적군을 보지 못해서 태연한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 선지는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보았기 때문에 태연하였던 것입니다.

2. 인간 지혜의 실패를 깨닫는 것입니다 아람 군대는 한 밤중에 자지 않고 도단성을 포위했습니다. 이제 엘리사를 잡기란 독 안에 든 쥐를 잡는 것처럼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정복하여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잡으려고 엘리사의 집 앞으로 달려왔을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적들은 앞을 보지 못하고 소경이 되어 더듬거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인도하여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 나아가리라”하고 그를 사마리아 성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귀중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만사는 사람 의 계획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람 군대는 엘리사를 포로로 잡겠다고 하다가 오히려 자기들이 포로가 된 것입니다. 자기 생각으로는 틀림없다고 믿어왔는데 실제의 결과는 정반대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 인간사입니다. 비상한 재주를 부리고 계획을 세워 놓아도 뚜껑을 열고 보면 잘못된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는 열쇠는 사람의 손에 쥐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약 4:15에 기록된대로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는 것이 마땅한 태도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계획, 나의 지혜는 실패하기 쉽고, 무너지기 쉽고, 변하기 쉬운 연약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3. 힘보다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아온 아람 군대를 보고 이스라엘 왕은 기뻐서 선지자 엘리사에게 “내 아버지여 내가 칼로 쳐 죽이리이까” 하며 거듭 물어보았습니다. 엘리사는 22절에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 앞에 주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 주인에게 돌려 보내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람 적군을 모두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고 고국으로 무사히 다 보냈습니다. 그들은 모두 엘리사 선지자와 이스라엘 왕에게 백배 사례하고 그 후덕을 높이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23절에 “이로부터 아람 군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칼로 적군의 포로를 죽이지 않고 사랑으로 대접하여 무사히 고국으로 살려 보냈더니 이 일로 인하여 아람 군사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쳐들어오지 않았고 두 나라가 평화롭게 지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더 중요한 교훈은 축복을 받고 사랑을 받은 걸은 아람 군대가 아니라 사랑을 베푼 이스라엘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에서 아람 군대를 죽였다면 강적 아람국은 복수를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왔을 것입니다. 마 7:12에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였습니다. 인내와 온유와 사랑은 우리에게 승리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4. 꿈과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당신은 왜 삽니까 왜 죽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다 그 이유를 대답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꿈을 가지고 살아야 성공할 수 있고, 보람을 느낄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보는 눈도 가질 수도 있고,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나라의 사람마다 삶의 철학이 다릅니다. 인도인은 자립정신이 강하고, 이스라엘은 의를 강조하고, 헬라인은 미를 추구하고, 로마인은 정의를 추구하며, 불란서인은 성실을, 독일인은 이성을, 영국인은 인격을, 미국인은 능력을 각각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불확실하다고 해도 마음에 지닌 철학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같은 하의 뜻은 어떻게 세줘야 됩니까 이기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이기주의는 독재주의입니다. 독재라는 의미는 언제나 불행한 결과를 가져습니다. 나 혼자만 살겠다고 하면, 반드시 나도 죽고 남도 죽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를 위하여 태어난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롬 14:7-8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은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5. 승리의 생활을 하려면 위를 보고 살아야 합니다 동서남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오늘의 시테를 현명하게 사는 지혜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마치 도단성이 아람 군대에게 포위당한 사정과 같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동서남북을 보지 않고 위를 보았기 때문에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보았고, 그의 천군과 천사를 보내어 주신 것을 보았습니다. 성도가 살 길은 여기에 있습니다. 엘리사처럼 위를 보고 살아야 희망이 있습니다. 위에서부터 오는 축복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 기도하는 시간, 기도하는 인구가 많아져야 하겠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는 위를 바라보면서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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