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수난이 선지자 (사 42:1-4)

첨부 1


확실히 하나님의 사람치고 묵시가 없었던 자는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800여년 후에 이 지구상에 이루어질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예언하는데 그의 모든 것이 즐거이 동원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수난의 선지자인 이사야의 영감을 듣고자 합니다. 메시야라면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얻게됩니다. 오늘은 수난의 선지자에 대해서 말씀 듣고 사 52:13-15에서는 수난의 제사장, 사 53:10-12에는 수난의 왕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의 사상 혹은 신앙의 기초는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창12장에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출발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끌어내어 대민족을 형성하실 때 축복을 하셨는데, 창 12:1-2에 “너희 본토를 떠나 내가 내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며.....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대민족이 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전 인류가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상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씨인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한 번 역사의 중요한 시점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출애굽시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는 장면입니다. 출 19:5-6에 “세계가 다 네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약속을 지키면 너희가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계약의 초점은 이스라엘이 전 세계의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세계 만민의 죄에 대한 책임을 어깨에 지고 하나님 앞에 사죄를 하는 민족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이런 민족정신을 지닌 민족은 없습니다. 이토록 아름답고 폭넓은 민족사상이 세월이 흐름에 딴 길로 빗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교만하여져서 사명을 다 감당 못하였기에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멸망했고, 계속해서 파사, 메데, 열강의 속국이 되어 비참하게 산산조각이 나고 세계의 유량민이 됩니다. 이런 비참한 역사 속에서 희망에 찬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시가 이사야서 42장입니다. 이 신앙시를 성취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메시야는 어떤 분이라여 합니까 (1) 먼저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받은 자로 제사장, 선지자, 왕을 메시야라고 합니다(1절) (2) 메시야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1절) (3) 메시야는 성령 충만한 종이어야 합니다(1절) 1) 성령은 바람과 같이 역사하십니다. 2) 성령은 물과 같이 역사하십니다. 3) 성령은 기름과 같이 역사하십니다. 4) 성령은 불과 같이 역사하십니다. 5) 성령은 혀와 같이 역사하십니다. 6) 성령은 비둘기와 같이 역사하십니다. 7) 성령은 인치는 역사를 하십니다. 메시야는 성령이 충만한 역사를 하는 종입니다. (4) 메시야는 거짓 선전을 하지 않는 종입니다.(2절) (5) 메시야는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를 멸시치 않는 종입니다(3절). (6) 메시야는 낙담하지 않는 종입니다(4절). (7) 메시야는 공의를 세우며, 하나님 복음을 교훈하며, 가르치는 종이라야 합니댜(4절)

2. 예수는 메시야로써 선지자입니다. 신 18:15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어다”고 했습니다. 이 예언은 행 3:22-23에서 그리스도에게 응용되었습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이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눅 13:33에 “오늘과 내일과 모래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고 하시며 자신의 운명을 미리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로서 미래를 예언했고(마 24:3-25, 눅 19:41-44), 선지자로써 특유한 권위를 나타내었으며(마 7:28-29), 그는 선지자로서 죄악을 책망하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적으로 그의 선지격의 확실성을 증명했습니다. 마 21:46에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라”고 했습니다. 요 14:24에 “너희의 듣는 말은 내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고 하시므로 그의 선지성을 자중했습니다. 사 9:6에 “그 이름은 기묘자라”고 하며 선지의 사역을 말씀했습니다. 말 3:1에 “언약의 사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중에도 특별히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 사역을 사 42:1에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고 했습니다. “공의를 베풀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사 42:1, 3, 4에 세 번 나옵니다. 이 말은 우리 예수님의 선지 사역을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1) 예수님의 선지역은 공의에 기초합니다(사 42:1) 즉 말씀ㅇ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수동적 선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공의”란 말은 인간의 모든 생활을 지배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참된 종교 또는 교훈을 말합니다. 이 단어가 헬라 말에는 “노모스”로 번역되는데 이 노모스를 다시 히브리어로 옮긴다면 토라(율법)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공의”라는 말은 “율법”이란 말로 대치할 수 있는 동의어입니다. 이 율법은 포괄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선지자로 말씀을 가진 사역자란 말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이 “말씀” 즉 공의를 가지고 사역했습니다. 그는 태초에 자신이 말씀이었고(요 1:1),그는 구약 여러 시대에 여러 모양으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히 1:1-2). 그는 성육신이 되셔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생명입니다.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그는 이미 선지자가 아닙니다.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이방의 침노까지 당하게 됩니다. (2) 예수님의 선지 사역을 선포행위입니다(능동적인 선지역) 사 42:1에 “공의를 베풀리라”고 했습니다. 베푼다는 말은 “내어 보내는 자” 즉 증거하는 자, 선포하는 자란 뜻입니다. 이는 선지의 능동적인 면을 말합니다. 선지자란 예수님은 이렇게 공의 즉 말씀에 기초하고 그것을 “내어 보내는 자” 즉 베푸는 자였습니다. 실로 그는 사 41:27에 “기쁜 소식을 전할 자”입니다.

3. 수난의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의 선지 사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의를 베푸는 자”라고 했습니다. 즉 “말씀을 내어 보내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도 아니고 단순한 일도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수난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내 보내는 선지자”의 수난받는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입을 통하여 내어 보내는 수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인 말씀을 입을 통하여 내어 보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요 6:60-67에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하며 많이 물러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했습니다. 그 결과 바리새인은 더욱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영원성을 설교할 때 유대인들은 믿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여 예수를 죽이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 말씀을 받지 않고 거절하면서 오히려 주님에게 도전했습니다. 주님은 빌라도의 재판석 앞에서도 그의 입을 통하여 그의 영광스러운 왕국의 내림을 예언했습니다. 그 때 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면서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얼굴에 침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그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마 26:65-68에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내어 주는 주님은 그 입을 맞고 얼굴을 맞았습니다. 이유는 선지자의 입은 진실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말씀을 전하던 그 주님의 입술에 쓸개탄 포도주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2)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내어 보낸 수난입니다. 요 6:1-15에 그는 오병이어로 장정 5,000명을 배불리 먹인 이적으로 선지자임을 증거했습니다. 그 결과 무리들 가운데는 이 표적을 보고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참 이적을 내어 줄 때 “십자가의 고초”가 어렵다고 물러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라 바다의 풍랑을 꾸짖으심으로 물결을 잔잔케 하셨을 때 “이가 누구이기에 바다와 바람을 잔잔케 하는고” 하는 결과까지 초래하며 그의 선지활동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보여주기를 요청받았을 때 선지자 요나의 경우를 들어 3일만에 그의 부활을 예언하였습니다(마 13:28-42). 그는 요나보다 더 크다고 하므로 그의 선지격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회당장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에서부터 살렸습니다. 그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게 했고,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또 문둥이를 깨끗이 해 주셨습니다. 12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자를 고쳐주었습니다. 그는 선지자의 권위와 공의를 보였습니다(마 21:19). 그래서 주님은 이르기를 요 10:38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요 10:38에 “그 일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내어 보내어도 사람들은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3) 주님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내어 보냈고, 이로인해 수난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보혈을 흘리심으로 자신을 제물로 내어 준 바가 되었습니다. 이것도 선지자로서 거절당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하나님의 공의 앞에 던져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는 벌거숭이 몸으로 십자가위에 제물로 올려졌습니다. 주님은 롬 4:25에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십자가 위에서 6시간 동안 달리시며 피와 물을 쏟으시면서 선지자의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눅 23:34에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 23:43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요 19:6-27에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 19:30에 “내가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죽기까지 말씀이 나오고, 죽기까지 피가 쏟아지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인 구원이 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내어 보내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 것입니다. 죽음을 지불하여도 어렵습니다. 주님은 공의를 베푸는 자로서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내어 보내는 자로서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