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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빌라도에게 들려온 세 가지 음성 (마 27: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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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는 로마 사람으로 주후 26년에 유대의 총독이 되어 10년간 재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을 때 당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순진한 백성들을 충동시켜 무죄한 예수님을 끌고 와서 십자가에 사형하라고 외치게 했습니다. 주님을 시기한 교권주의자들은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가 사형에 해당한다고 고소를 제기하며 최종의 판결을 기다렸습니다. 그 당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전래는 유월절을 당하면 무리의 소원대로 총독이 죄수 한 사람을 석방하는 전래가 있었습니다. 그때 살인하고 민란을 일으키다가 구속당해 있는 살인죄수 하나가 있었는데 그가 바라바였습니다. 무리들은 그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강요했던 것입니다. 이때 재판석에 앉아 예수님을 재판하던 빌라도에게 세 가지 음성이 들려왔으니 오늘 이 세 가지 음성에 대해 알아봅시다.

1. 아내의 소리었습니다(19절)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았을 때 그 부인이 급히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저 옳은 사람에 대하여 아무 상관도 하지 마십시오. 지난밤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에게 처음 들려온 소리는 아내의 소리였는데 그 음성은 예수가 옳은 사람인 것을 알려주는 소리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빌라도의 아내 이름은 “크라우디 아프로그”라고 합니다. 과연 빌라도의 아내의 소리는 의의 소리였습니다. 빌라도는 아내의 올바른 소리를 들었으나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명심치 않은 것은 큰 과오였던 것입니다. “크라우디 아프로그”의 소리는 빌라도의 그릇된 정치와 재판을 시정하기 위하여 들려준 정의의 음성인 것입니다. 빌라도에게는 이런 양처(良妻)가 있었습니다. 요직에 있는 사람이 그가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내조를 하여줄만한 어진 아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악처 때문에 패가망신한 아합이나 헤롯에 비하면 그래도 빌라도는 다복한 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릇된 길을 걷는 인생들에게, 비신앙의 길에서 헤매이는 신자들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을 통하여 충고의 음성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소리를 무시하지 말고, 귓전으로 흘리지 맡고 마음깊이 받아서 잘못된 길을 시정해야 합니다. 다윗이 범죄 했을 때 나단 선지를 통해서 들려온 음성은 병든 그의 영혼을 살리는 음성이었습니다.

2. 양심의 소리 빌라도에게는 양심도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손이라도 씻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정도로 자신이 선고한 판결에 그토록 괴로워할 까닭이 있었겠습니까 빌라도는 군중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 하였으니 때려서 석방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진정 교권주의자들이 고소하는 나사렛 예수는 무죄하다는 소리가 그의 양심에서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눅 23:4에서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서 죄가 없도다”라고 한 것이나, 눅 23:22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고 한 것은 예수가 무죄하다는 것을 양심을 통해서 분명하게 깨달은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양심에서 들려온 소리는 일면 하나님의 음성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양처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양심대로 밀고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자신의 소신과는 너무나도 엉뚱한 판결을 내리고 만 것입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를 놓아주시오”라고 외칠 때에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그는 군중의 부르짖음을 들을 뿐 양심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외면하고 맡았습니다. 정의를 희생시키더라도 부귀영화를 잡아야 하느냐 부귀영화를 희생시키더라도 정의를 살려야 하느냐는 기로에서 방황하는 빌라도는 바라바냐, 예수냐의 양자택일을 군중에게 요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그것을 물었어야 합니다. 군중들에게는 예수를 택하여 주기를 은근히 바라면서도 자신이 바라바를 택한 어리석음은 무지 때문이 아니라 무능 때문이었습니다. 알아도 용기와 희생심이 없으면 이런 꼴이 되는 것입니다. 식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양심과 함께 필요한 것은 용기와 결단이며 희생정신입니다. 헤롯의 칼날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결코 세례요한이 될 수 없으며 순교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정의라는 탑은 희생이라는 주춧돌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바라바냐 예수냐의 갈등 속에서 신음하는 빌라도의 후예들입니다. 전자를 택하자니 양심의 소리가 무섭고, 후자를 택하자니 군중의 소리가 두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보다 세상의 소리, 군중들의 소리에 귀를 더 기울이는 한 오늘도 정의는 십자가 위에서 찢기우기 마련입니다.

3. 군중의 소리 빌라도에게 들려온 세 번째 소리는 무지한 군중들의 소리였습니다. “살인자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는 소리였습니다. 빌라도는 유감스럽게도 아내의 소리도, 양심의 소리도 다 무시하고 군중들의 소리에 따랐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그 소리는 불의의 소리, 세상의 소리, 비 진리의 소리였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세상소리 듣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내 신앙에는 조금도 유익이 없습니다. 도리어 큰 손해를 입게 됩니다. 군중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한 것은 주님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도 잘 모릅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넓은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범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을 모르므로 범하는 잘못이 얼마나 큽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말씀 중의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저희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희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함으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저들은 주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몰라서 가장 좋은 천구되시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했고 결국 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죄인의 친구시요, 가난한 자의 친구시며, 병든 자의 친구시며,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 주시는 가장 사랑이 많으신 친구이십니다. 여러분! 빌라도와 군중들은 이천여년 전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오늘 우리들은 다른 모양으로 예수님을 못 박고 있습니다. 우리는 군중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빌라도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소리, 불의의 소리에 귀를 막고 나에게 유익을 주고 내 영혼이 살지는 그 음성만을 따라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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