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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강이 흐르는 곳에 (겔 4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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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미 건조한득한 에스겔서는 간단히 극적인 장면 가령 해골 골짜기의 해 골의 부활기록과 같은 기사와 책에서 보는 것과 같은 화폭 같이 아름다운 생명강이 흐르는 기사와 같은 기록이 있어 흥미를 주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천사의 인도로 성전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러 그 우편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측량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하고 에스겔로 건너게 하므로 건너고 보니 겨우 발목이 잠길 정도의 얕은 물이었습니다. 다시 그가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는 그 물이 허리에 올라오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나니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성전 문지방 밑으로 물이 흘러나와 동으로 향하여 흐른 것은 민 족 신앙의 원천이 성전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흐르는 물이 흘러내려 갈수록 수량을 증가한 것은 일상생활을 통하여 신앙의 도가 점점 깊어지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흐르는 물이 마침내 강을 이루고 강 좌우 언덕에 나무가 무성하고 날마다 신성한 실과를 맺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그 이유를 그 물이 성소로부터 흘러나온 까닭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이 강을 이름하여 ‘생명강’이라 불리웁니다. 이 고상한 환상 속에 주님이 가져다 주시는 구속의 능력을 봅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생 명 강이 흐르는 곳을 신령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승리를 보는 것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생명강의 원천 에스겔이 성전 문에 이르러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으로 흐르다가 성전 우편 계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이렇듯 생명강의 흐름은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 근원은 여호와의 보좌요, 그 통로는 여호와의 갈보리 제단인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 참된 교훈이 있습니다. 곧 이름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상징은 제단 밑으로부터 흘러내립니다. 그러므로 생명 같이 고통과 희생과 죽음에 원천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에스겔의 눈에 기이하게 보여졌으리라고 생각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겔 14:8에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나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이는 영적생명의 축복이 하나님의 임재의 중심지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뜻합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강의 흐름은 여름의 폭염에도 고갈하지 않고 눈보라 치는 겨울바람에도 얼지 아니합니다. 4시의 계절은 바뀌우고 우리의 자신도 변하지만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생명강의 근원을 찾기만 하면 다함이 없는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생명강의 원천에서는 여름도 겨울도 없이 생수가 강 같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옛날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 마르는 것을 보았으나 생명수 샘이 되시는 주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선 이었으나 그 원천이 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고레스 왕은 유프라 강물을 변하여 바벨론을 함락하였으나 그 어떤 힘이든지 사람의 힘이거나 사랑의 힘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을 변 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시대는 변하나 은혜의 강물은 변함이 없습니다. 생명수는 그 근원을 하늘과 하나님께 두었으니 곧 하나님의 긍휼과 그 구속 의 근원을 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 지방 수가라는 동네에 가셨을 때 유서깊은 야곱의 우물 곁에 이르러 때마침 물을 길러나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였습니다. 그 때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 달라 하나이까” 하고 반문하였습니다. 당시는 민족적 감정 때문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면조차도 않던 때입니다. 이 기회를 포착하셔서 주님은 그 여인의 영혼의 갈급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내게 주었으리라.” 이 말씀이 그 여인에게 흥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였으나 아직도 생수의 의미를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기 에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나이까 이 우물은 우리 조상 야곱이 준 우물인데 당신은 야곱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까”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때에 주님은 이 갈급한 영혼에게 생수의 근원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을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생수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시요, 아니 그 자신이 생수의 원천이 되십니다. 요 7:37-39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때는 초막절 끝날 대성일, 큰 날이 있습니다. 주님은 구름 같이 모인 민중들이 형식적인 열심에도 불구하고 저들 중심에 진정한 만족도 기쁨도 힘도 없음을 보시고 외치신 말씀이십니다. 화려한 의식과 축제의 기분에 도취되었으나 내심에는 조금도 만족이 없는 군중심리를 간파하신 주님은 자신이 진정한 생수의 근원이요, 저를 믿고 주님 내 주의 체험을 가진 자만이 그 배에서 생수가 강 같이 흐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흐르는 물이 강을 이루어 갈라져 네 강의 근원이 된 것처럼 광야의 이스라엘이 반석을 칠 때에 물이 솟아나온 것처럼 오늘 본 문 성소로부터 흘러나오는 강과 같이 주님이 계시지 않은 한 어떤 종교행사도, 축제의 기분도 집회의 소동도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 내심 꼭 불만의 원인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생명강의 원천을 찾지 못한 까닭이 아닙니까

2. 점점 더 깊어지는 생명강 생명강이 흐르기 시작한 원천에서 일천 척을 척량해 보니 물이 겨우 발목에 잠기다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한 자리에 서니 무릎까지 올라가는 수심 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한 곳에 이르러보니 허리에까지 잠기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수심을 조사해 보니 벌써 큰 강을 이루어 헤엄칠 수 있는 흐름이 되었고 건너지 못할 깊은 강이 되 었습니다. 이 이상적인 그림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의 점진적인 발전을 뜻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에덴에서 흐르기 시작한 약속의 강물은 시대가 바뀌는 동안 수심의 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에덴에서 처음 흐르기 시작할 때는 희미한듯 하였으나 노아 시대에는 확실히 깊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언약이란 발목에 잠기는 깊이로 발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이르러 무릎에까지 잠긴 언약이 새 시대의 여 명을 가리킬 때 곧 신약의 새아침이 다가올 무렵 언약의 수심은 허리에까 지 잠기게 되었다가 그 후 생수의 원천도 되시고 생명샘이 되시는 주님이 오심으로 건너지 못할 생명강을 이루게 되겠습니다. 이렇듯 6천년 동안 이 강물은 흐르고 또 흘러 다함이 없는 신약시대, 곧 은혜시대를 이루었습니다. 지극히 적은 물이 넓고 깊은 건너지 못할 강이 된 것처럼 팔레스틴에서 흐르기 시작한 물줄기가 오늘은 온 세계에 덮히 게 되었습니다. 여기 그리스도 복음이 특색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생명강이 흐르는 곳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 흐름을 가로막는 장애만 없으면 이 흐름에 적대하는 암초만 없으면 복음은 의와 진리로 전세대를 정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위대한 흐름이 우리 조국에도 흘러왔건만 이 흐름을 가로막는 장애 때문에 이 흐름에 적대하는 암초때문에 복음의 세력이 정체된 것은 슬픈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오늘 말씀으로 생수 의 호흡이기 때문에 성장하고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현상유지에 자족한다면 위대한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 반항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전진의 물결이 정체되었다면 이 흐름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도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의 믿음의 흐름은 순조롭게 흐르고 있습니까 강단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을 만담이나 혹은 농담으로 듣는 것처럼 설교자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의 현실은 목사가 설교를 들려주는 것보다 귀를 즐겁게 하는 만담을 들려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보다 모든 설교를 만담으로 듣고 해석하는 듯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던 때였습니다. 롯이 천사의 경고를 받고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고 할 때 그 사위들은 장인의 말들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저들의 결과가 어찌되었습니까 저들은 유황불로 망했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세속화되고 설교자들이 타락하였다고 한들 강단에서까지 만담이나 농담을 할 수 있겠습니까 힘없는 찬송소리 기도에 힘이 없다는 것은 정평이지만 아멘조차 들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강의 흐름은 점점 깊어가는 것이 원칙입니다. 교회는 생기운동이기에 작년보다 금년에 어제보다 오늘이, 양으로보다 질적으로 부흥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 없으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입니다. 사데 교회와 같은 주님의 책망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3. 생명강이 흐르는 곳에 “이 강물이 흐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들어감으로 바닷물이 소생함을 얻겠고 이 강이 흐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리라‥‥‥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기지 아니하고 날마다‥‥‥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생명강 흐르는 곳에 사해바다도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생명강이 흐르는 곳에 바닷물이 소생하고 만물이 새롭게 되리라. 생명강 흐르는 곳에 육체의 열매가 자취를 감추게 되리니 음행, 더러운 것, 호색, 분리, 이단, 투 기, 술취함, 방탕 등이 깨끗이 씻기워지고 강 좌우에 사랑, 희락, 화평, 인 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성령의 열매가 맺히리라 생각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시 한 번 생명강의 흐름이 성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교회 흐름이 한국 사회를 밝힐 수 있어야 하고 생기운동의 원천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강물이 줄기차게 흘러갈 수 있도록 모든 장애물을 해치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만물이 소성하는 기적이 있고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있고 새로운 결실의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벧후 3:18에 베드로의 축도에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하였습니다. 스펄죤의 해석은 “은혜에 있어 풍성해지리라 한 가지 은혜 뿐 아니라 모든 은혜에 있어 풍성해지리라”고 했습니다. 이제까지보다 더 분명히 주님의 언약을 믿으십시요. 믿음은 충분히 연 속적으로 단순하게 발전시키십시오. 또는 사랑에 있어 풍성하시오. 그대의 사랑이 확대되고 더욱 강해지고 더욱 실천적이 되고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 영향을 끼치도록 하시오. 겸손에 있어 풍성하시오. 겸손을 구하고 자 신의 무가치함을 아시오 겸손으로부터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예수님 과 더욱 깊은 교제를 가지시오. 사랑의 물결이 순탄하게 고요하게 흘러내리도록 하십시다. 이 흐름이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고요히 흐를 수만 있다면 교회의 생기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리라고 생각해보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겸손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장애물을 걷어치우도록 합시다. 실상 믿음의 호흡을 갈라지게 하는 것도, 사랑의 흐름을 흐리게 하는 것 도, 이 교만의 암초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생명 강수가 거침없이 흘러 태평양 아시아 대륙을 횡단하여 인도양 대서양 세계를 채우도록 합시다. 마지막으로 타골의 글귀를 읽어보시라. “아시아의 빛나는 황금시대의 한국은 그 빛을 밝힌‥‥‥ 한 주인공이었다. 그 등불이 다시금 켜질 날에는 동방은 찬란하게 온 세계를 밝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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