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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명예를 소중히 (전 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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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에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라고 했습니다. 어떤 죄 많은 여인이 귀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께 와서 그 옥합을 깨서 예수님의 발에 부은 후 정성껏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예물을 받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여인의 죄를 다 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축복의 말씀가지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건에야말로 오늘 본문에 대해 좋은 해석인 것입니다. 이름 모를 여인이 주님에게 보배로운 기름을 바쳤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그 여자의 행위는 낭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아름다운 이름을 얻어 그 이름이 역사를 통해서 잊혀지지 않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내 몸을 불살라 헌신 할 때 얻을 수 있는 상급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파렴치적인 행위로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을 하지 않습니다. 명예 같은 것이야 아무려면 어떠냐는 사람이 있지만, 잠 22:1에 보면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더 소중히 여기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성도는 명예욕에 날뛰지도 않습니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것과 명예를 나타내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에나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어느 모임에서나 임원은 의례히 자기가 맡아야 되는 줄로 착각을 합니다. 자기의 이름이 끼이지 않는 일에는 무조건 반대요, 심하면 중상모략도 합니다. 이것은 옳지 못한 것이요, 헛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명예를 나타내려고 애쓰지 않지만, 그 명예는 깨끗하고 아름답게 지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내 이름은 하늘나라 생명책에 녹명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면 이보다 더 큰 명예가 없고 이 세상 더 큰 출세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런 영광을 깨닫는 사람이라면 달리 출세욕에 급급해 하거나 불명예스러운 것을 할 수 없습니다. 둘째, 내 이름은 예수께서 날마다 불러가며 기도해 주시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내 이름을 불러가며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내 이름을 외워가며 축복해 주시한 그런 귀한 이름이라는 말입니다. 세째, 내 이름은 주님의 성호와 관련되어 있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었으므로 예수님과 내 이름은 서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이름에 욕이 되는 것은 주님의 이름에도 욕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는 명예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주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입신양명만을 노리는 것은 성도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정당한 명예는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1절 하반절에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말을 얼른 생각할 때 이해하기가 퍽 어렵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기뻐 잔치하고 죽으면 슬퍼하는 것이 기정사실인데 성경은 그와 반대로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계 7:16-17에 “저희가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할 것이요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죽는 순간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게 되고 세상 것은 꿈에 본 듯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마련하신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때 그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거기는 굶주리는 슬픔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눈물나는 일이 많지만 배고픈 설움이 가장 큰 슬픔입니다. 그런데 저 하늘나라에서는 다시 주릴 필요가 없습니다. 목마를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 날이 낫다고 전도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 55:1-2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와라 돈 없는 자도 나아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세상 모든 눈물을 하나님 나라에서 씻겨 주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업상의 어려움을 당할 때, 부모를 여월 때, 갖은 생활고로 흘릴 때, 모든 눈물을 다 씻겨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은 괴로운 세상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들려주신 말씀에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고 하시며, 성경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어디 “죽는 것이 복 되도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는 죽음이 끝인줄 압니다. 그 죽음 뒤를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사도 바울처럼 “우리가 지금 모두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나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 분명히 보게 될 것”이라고 고백 할 것입니다. 시 116:15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 나라의 큰 기쁨이므로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신앙으로 해석 할 때만이 은혜 되는 말씀인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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