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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죽음 (창 2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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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사는 자는 반드시 사망할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망의 고개턱을 넘지 않은 자가 누구입니까? 남녀노소, 빈부귀천, 영웅호걸, 미인 재사, 귀족 고관, 평민 상노, 음녀 탕자, 병약 불구, 무신론자, 복술장이 등등 그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지 하나님께서 한 번 부르실 때는 일초의 지체도 할 수 없이 떠나가야만 할 몸들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두 계열의 죽음이 있는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죽음과 하나님을 믿다가 죽은 자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 7:4에 “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며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장의 집에 있느니라 ” 고 했습니다.

1. 불신앙적 입장에서 보는 사망

 (1) 극심한 공포를 느낍니다. 인간 세상의 모든 공포은 사망에 근원을 둡니다. 기근, 질병, 형벌, 원수, 전쟁, 천재지변 등 그 배후에 반드시 사망이 따라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공포증을 느낍니다. 허무주의 철학자 독일 쇼펜하워는 생을 저주하면서 “ 이 세상의 최대 행복자는 이 세상에서 출생하지 않은 자요 그 다음 행복자는 이와 불행하게 세상에 난 바에야 일찍 죽는 것이다 ” 고 염세주의를 말하고 자살을 권장했으나 자신은 73세를 살았고 누가 자기의 생명을 해칠까봐 자기 침대 밑에는 칼을 두고 평생 사망의 두려움 속에서 산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은 공포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2) 슬픔을 가져다 줍니다.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면 온 집안이 다 기뻐하지만 누구든지 죽음을 당하면 슬피 우는 것이 상례입니다. 죽은 자가 누구이던 간에 그와 연관 있는 사람들은 그에 죽음에 대해 슬퍼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마지막 길이나 막을 길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사망으로 종지부를 찍습니다. 사망의 함정에 빠졌다가 나온 용사가 없고, 인생의 백발을 다시 검게 못하고,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멈출 용사가 없습니다. 무정한 광음은 우리 인생들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리로 몰아갑니다. 의사도 죽음을 막을 수 없고, 제왕 호걸도 죽음을 막을 수 없으니 과연 죽음은 인생 역사의 최후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2. 신앙적 입장에서 보는 사망관

 (1) 사는 생이요, 생은 사입니다. 신앙적 입장에서 보면 출생보다 죽음이 기쁜 것입니다. 엄숙히 말해서 출생은 장차 죽으러 오는 것이요, 죽음은 영원한 세상으로 영원히 살려고 이사가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르시기를 마 10:39에 “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 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죽음을 부활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2) 인생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범죄로 인하여 더러워진 정신, 심령, 성품, 행위, 언어까지 다 사망의 소독통에서 완전 무결하게 정화시키는 것이 죽음입니다. (3) 안식 세계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회생활은 고통과 염려가 너무 많고 무거운 가정의 짐, 사회의 짐, 교회의 짐을 짊어지고 먼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와 같이 참 안식을 얻지 못해 허덕입니다. 주님께서 죽음을 보시고 종종 “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고 하셨는데 인간이 낮에 일하고 방에 잠자며 쉬는 것처럼 살아서 일하고 죽어서 쉬는 안식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 안에 있는 자들이 가진 부활 신앙인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 믿는 자에게 참 안식 세계에 들어가는 것임을 알고 믿을진대 슬퍼하거나 싫어하거나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고 고대하다가 환영하고 축하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어떤 사망관을 가지고 살 것입니까? 불신앙의 사망관을 버리고 신앙적인 사망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3. 아브라함의 죽음

 아브라함은 이삭이 결혼한 후 35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입니다. (1)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이 결혼한 다른 아내 그두라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고난 후 이삭을 결혼시킨 다음 극히 외로웠습니다. 그는 자기를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리하여 결혼했는데 수석 여종이였던 그두라와 결혼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두라에게서 여섯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들은 통해서도 그의 자손이 번영할 약속이 부분적으로도 성취된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이 자기 재산을 분배했습니다(5-6절) 이 여섯 아들이 태어난 후에 아브라함은 신중하고 공평하게 자기의 집안을 정리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이삭을 그의 상속자로 삼았습니다. 상속자에게 주는 약속의 축복은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과 계약 상속권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재산의 상속자로서 분배를 이행하였습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다른 아들에게도 재산을 나눠주었습니다. 이스마엘과 그두라에게서 난 여섯 아들에게도 나눠주었습니다. 재산 분배를 공평하게 하였습니다. 그 아들들을 이삭과 멀리 떨어진 곳에 정착시킨 것도 깊은 생각에서 우러나온 신중한 태도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죽은 다음에 잘못되는 일이 없ㄷ록 하기 위하여 “ 그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 ” 이 모든 일을 처리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손수 해야 할 일을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임을 명심하십시오. 그는 자기의 서자들을 가나안 동쪽에 있는 땅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은 동방 사람이라 불리워졌고, 그 수가 많은 것으로 유명합니다(사 6:5, 33). (3) 아브라함은 175세를 향수했습니다. 그가 죽은 것은 그가 가나안에 온 지 꼭 100년이 자난 후였습니다. 그는 100년간 객지에서 나그네로 지냈습니다. 아브라함은 선한 일을 많이 하였고, 믿음이 있는 자요, 앓은 일도 없었어도 결국 죽은 것입니다. 그는 종상 열조에게 돌아간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진액이 진하였고 수가 높아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실증날 만큼 살다 죽었으니 복된 자입니다. (4) 아브라함의 장례(9-10절) 이곳에는 그이 장례에 대한 성대한 의식이나 행사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장례는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엄숙하게 행 하였습니다. 장례는 그들이 인자한 아버지에게 표할 수 있는 마지막 존경의 기회였습니다. 이전에는 이삭과 이스마엘에게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죽음은 이복형제간의 사이를 화해시켜 다시 다정하게 하는 동기가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사서 사라를 장례시킨 자기 땅에 묻히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서로 사랑하던 사람들과 함께 묻힌 것입니다. 그것은 순결한 일인 동시에 칭찬할만한 일입니다. 그들 부부는 죽어서도 서로 함께 있기를 바랐으며 함께 부활하리라 믿고 함께 묻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삶은 사나 죽으나 언제나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많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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