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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 (창 4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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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에 살았던 스코트랜드의 작가 로버트 스티븐슨이 써서 파문을 던진 “ 지킬 박사와 하이드 ”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의사인 지킬 박사는 이상한 약품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약품은 인간의 성품을 바꾸어 놓은 약이었습니다. 차마 다른 사람을 실험할 수가 없어서 지킬 박사는 자기 자신이 그 약품을 마시게 됩니다. 약을 마시고 나면 지킬 박사는 험상궂은 얼굴로 변하고 기나긴 이가 솟아 나오며 사람을 학대하고 죽이는 사나이로 변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이든입니다. 술집에 찾아갑니다. 시비를 걸어 사람을 치고 모두를 깨뜨려 부수고 광란을 벌이다가 다시 약을 먹으면 선량하고 점잖은 지킬 박사로 되돌아 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풍자적인 결론에서 얘기를 그칩니다. 약을 먹고 하이드로 변한 이 사나이가 길거리에서 그만 자기의 장인 어른을 살해하고 맙니다. 그래서 경찰의 추적이 시작되었습니다. 도망치기 시작한 하이드는 집으로 들어와 빨리 약을 먹어야 지킬로 되돌아 올 수 있었으나 약을 먹기 전에 경찰의 추적을 받고 권총에 맞아 죽게 되는데 죽는 순간 하이드는 지킬 박사로 변한 것입니다. 즉 본래의 모습을 되찿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선과 악이 교묘히 얽히어 있는 인간의 모습을 폭로하는 풍자였습니다. 살인하는 하이드가 바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지킬 박사였다는 점입니다. 빛과 어둠을 한 몸에 지닌 지킬 박사의 밑바닥에는 이중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선과 악, 사랑과 살인의 증오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가장하고 살고 있으면서도 그 아름다움 속에는 언제이고 악마의 모습이 깔려 있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절대적인 선인도, 절대적인 악인도 없다는 말입니다. 선과 악이 우리들 속에 교묘하게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이버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 동시에 타락한 존재라고 과감하게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악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마귀학을 연구하는 성서 학자에게서 말을 들어 보고자 합니다. 초기 히브리 시대에는 마귀는 사막에서 살고 있는 수염소라고 이해했습니다. 혹자는 마귀는 사람들을 파괴하는 폭풍우라고 보았으며, 혹자는 사울 왕을 괴롭히는 악령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300년 전 쯤에 마귀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천사는 한 인간의 출세에서 자라나는 모든 과정을 돌보는 하나님의 사자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 사람을 사로잡았으며 사로잡힌 사람들은 병에 걸려 마귀의 종노룻을 하게 되었다고 이해했습니다. 주님께서 고치신 수많은 마귀들린 자, 병든 자는 바로 마귀의 장난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또 혹자는 사탄은 마귀의 왕국을 다스리는 자라고 이해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마귀는 파괴자였으며 사탄은 유혹자였습니다. 성서는 우리 삶과 역사 속에서 파괴하는 마귀 유혹하는 사탄의 세력이 우리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세상의 낙관론자들의 역사관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좋은 환경만 제공하면 악은 사라지고 선의 결실을 얻게 되고, 선이 자라면 그 사회는 선한 사회로 변한다는 이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가령 미국은 우리보다 더 좋은 환경을 가졌으나 우리보다 더 많은 정신질환과 범죄로 고민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값싼 환경 개선론에 동의하치 않습니다. 우리 속에 침투한 악은 그리 쉽게 넘어가는 세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의 횡포는 심각하고 강력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민하여 고백하기를 롬 7:22-24에 “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자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자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라 ” 고 고백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역사 철학적 거작 데 키워타테 데이(De Cwitate Dei:하나님의 도성)를 보면 근본적으로 다른 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서로 접촉을 계속해 나가는 두 나라 즉 하나님과 백성과 이 세상의 나라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이 두 나라의 기원은 악한 천사의 타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두 나라의 발전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가인의 후손과 아벨의 후손으로 구별되며 마침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과 적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 즉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과 지상의 도성(Civita terras huis mundi)이 대립되는 상태로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정신사나 철학사 또는 신학사를 보면 역시 이와 같은 두 가지 면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중심한 생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람을 중심한 생각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에게서 출발하여 사람에게로 나아오는 것이나, 후자는 사람에게서 출발하여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중심한 생각은 성경의 복음주의적 사상인데 이는 ①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시인하고 ②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서 그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생각하고 사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사람을 중심한 생각은 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② 사람의 이성과 지혜, 지식의 힘에 근거하여 사색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예로써는 현실주의 철학에 뿌리를 박고 있는 볼트만의 사상을 들 수 있는데 그는 “ 불안에 의해 일깨워진 자기에의 관심 중에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결단은 순간에 있어서 거듭 거듭 과거와 미래와의 사이의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 고 가르칩니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결단과 하나님 중심 사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 37장에서 50장까지를 읽어보면 애굽의 총리대신 요셉의 얘기를 볼 수 있습니다. 창 45:4-8을 볼 것 같으면 요셉은 자기를 애굽으로 팔려가게 한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말을 빌려 말하면 “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에 보내셨나이다 ” 라고 했고, “ 하나님이 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에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내신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라 ” 고 했습니다. 형들은 자기 자신들의 결단과 뜻에 의해 자유로히 행동하였으나 끝에 가서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결단,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결단,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결단과 뜻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칼발트도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면서 “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자유행위 입니다. 사람 편은 원인이나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 라고 했습니다. 얼핏 들으면 사람의 자유행위가 부정되는 것처럼 느껴지나 이 발언에서 사실은 사람과 그 행위의 긍정 속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선과 악 사이! 천사와 마귀 사이! 예수와 사탄 사이! 참다운 평화와 죽음 사이를 배회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 속에는 성서만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궁원의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삶과 현실은 악이 무성하고 선은 언제나 패배하는 것만 같습니다. 바로 이 현실 때문에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으며, 삶을 저주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창 45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형들은 미움과 질투로 인하여 요셉을 이스라엘 대상들에게 팔아 넘기웠으나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은 그 촛점이 요셉이 어떻게 총리대신이 되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성서의 촛점은 풀 수 없는 비극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은 보다 크고, 보다 넓으며, 보다 근원적인 구원의 목적을 가지시고 이 역사의 방향을 인도해 오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참신앙이라고 부릅니다. 행복이 왔을 때는 즐거워하며 감사하다가 비극이 왔을 때는 하나님을 외면하려는 신앙은 신당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려운 가운데서 하나님의 경륜을 묵묵히 읽어가는 바로 그 눈과 가슴만이 신앙을 가졌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형들이 자기 앞에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요셉은 지난 날을 생각하며 하나님이 자기를 그러한 역경과 환난 속에 처하게 하시다 이와 같이 높이신 이유를 비로소 완전히 깨닫고 형들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감사하며 관용을 베푼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악을 선으로 갚았습니다. “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에 보내셨나이다 ” 라고 했습니다. 용서의 역사가 있는 여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태동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구원의 비밀을 본 또 다른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고 했고, 또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 고 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곳에서는 정의는 있을지 모르나 아무런 역사의 변화가 없습니다. 진정한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했습니다. 바로 이 비밀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여야겠습니다. 용서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영혼에게는 참 행복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아집을 버리고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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