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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머무를 때와 가야 할 때 (민 09: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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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헬라어로 호모 사피엔스라고 합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존재” 라는 뜻입니다. 사고 능력은 인간만이 지닌 특성입니다. 또 인간을 호모 화베로라고 합니다. 그 뜻은 “도구를 만드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아담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도구를 만들어 왔습니다. 원시적 일용품을 만들고 돌이나 나무나 철로 무기를 만들었던 인간의 두뇌는 이제 컴퓨터 와 핵무기와 레이저 광선과 우주선과 유선공학을 만드어 냈습니다. 인간을 호모 루렌스라고도 합니다. 그 뜻은 “유희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삶 자체를 즐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행을 하고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또 인간을 호모 네간스라고 합니다. 그 뜻은 “부정할 수 있는 존재”라 는 뜻입니다. 즉 “아니요”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라고 해야 할 때 “아니오”를 연발하면 큰일입니다. 인간에겐 “아니오”라고 거절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만 때와 장소를 분별치 못한다면 자신에게 큰 불행을 안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호모 에스페란스라고 합니다. 그 뜻은 “희망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간만이 내일을 생각하고 미래를 꿈꿉니다. 짐승에겐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미래를 대비하고 희망을 가지고 살기에 항상 내일을 위해 준비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시간도 생각하고, 도구를 만들고, 생을 즐기고 자유를 구가하면서 희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 속에 문제가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도구를 만들면 만들수록 불안이나 절망이 앞을 가로 막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뛰어넘어 인간은 신앙적인 존재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즉 인간은 믿음을 가져야 하는 존재이며 하나님과 관계를 가져야만 합니다. 이제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하여 전진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한 달이면 갈 여정을 40년이나 걸리도록 갔습니다. 왜 한 달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40년이나 걸려서 비로소 도착할 수 있었는가. 이제 본문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여호와의 명을 쫓아 행동하였습니다. 본문에 “여호와의 명을 좇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명 령”은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동한 것입니다. 행진도, 머무르는 것도, 진을 치는 것도, 전쟁을 하 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한 것입니다. 요 15:14에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군대 규율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명령 복종입니다. 근무지를 이탈하고 싶어도 명령이 없으면 떠날 수가 없습니다. 쉬고 싶어도 행군 명령이 내리면 행군을 계속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기 때문에 딴소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머무를 때 전 3:1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중국 속담에 하늘에 오르려는 용은 개천에 누워 천년을 보낸다고 합니다. 강태공은 위수에서 곧은 낚시로 수십년을 기다려 때를 얻었고, 한신은 옛날 자기 집의 하녀로 있는 여인에게 얹혀살고 시정배의 사타구니를 기면서 때를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40년 긴 세월을 미디안 광야에서 초라한 양치기로 보냈으며, 사무엘은 젖 떼고부터 엘리 제사장 밑에서 하나님께서 불러 쓰실 때까지 엎드려 있었고, 다윗은 여러 번 사울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때를 기다리며 쓰라린 망명 생활을 감수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영광의 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때를 분별하고 기다리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이 장막에 머물면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했는데 그때에 따라서 한 달 또는 1년 이상 있을 때도 있었으니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낮의 뜨거운 열기와 밤중의 추위, 끊임없이 괴롭히는 해충과 불편한 환경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성막의 구름이 떠오르기를 기대하였으나 오늘도 구름이 여전히 머물러 있음을 보았을 때 그들은 초조하고 미칠 듯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기다리게 하십니다. 무서운 고독 때문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진퇴양난의 늪에 빠졌을 때에도, 생명이 위협받는 사망의 골짜기에서 헤매고 있을 때에도, 앞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현실에 직면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이 “더 기다리라”고 명령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더 기다리며 인내하는 가운데 깨닫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보다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이 우리를 움직여야 할 온전한 때를 예정하시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순종하는 신앙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가야 할 때 20절에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고”라고 했습니다. 가야 할 때는 언제입니까? 물론 구름이 떠올랐을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구름이 떠 오른 성막은 이스라엘 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음으로(민 2:17) 그 방향을 알려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가야 할 시간은 되었지만 길도 없는 광야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약속의 땅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본문은 문제의 해결에 대해 “여호와의 명을 좇는 것”이라고 밝혀줍니다. 진행이란 희망과 기대를 의미하고 성공과 성취와 발전을 의미합니다.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전진하는 것은 확실히 희망찬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제아무리 희망과 성공과 발전과 목적이 약속되고 선한 것이라고 해도 제멋대로 전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구름이 떠오르면 떠났고, 명령이 떨어지면 떠났습니다. 우·리가 광야와 같은 세살을 통과하며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기 위해 언제 움직여야 할까요? 그것은 여호와의 명을 전달받았을 때입니다. 여기서 성막의 구름은 객관적이며 외면적인 징조라고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명은 주관적이며 내면적인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시설이 완벽한 배라고 할지라도 해도의 인도를 받지 아니하고서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름이 떠올랐다고 무작정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성막 위의 구름과 하나님의 명은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라고 누가 묻는다면 그 구름은 성경 말씀이며 하나님의 명은 네가 골방에 엎드려 있을 때 나타난다고 대답하면 됩니다. 그 때 너는 시 40:1에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라고 노래한 시인의 마음을 진정한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를 통해 역사하길 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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