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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위대성 (삼상 17:4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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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사에 나타난 다윗의 생이를 보면 그의 삶은 참으로 위대한 생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름 “ 다윗 ” 이 “ 사랑스러운 이 ” 또는 “ 지도자 ” 라고 하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은 다윗이 위대했던 이유를 몇 가지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1. 기도의 사람입니다 시편에 다윗의 시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시요, 기도의 시였습니다. 다윗은 일생 동안 어떠한 때에도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미하고 하나님께로 곧 바로 나아갔습니다. 다윗 왕의 아들이 병들었을 때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할 때 밤이 맡도록 땅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루 이틀이아니라 한주일 동안 일이 결단이 나기까지 침식을 전폐하고 땅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이렛만에 죽었습니다. 그는 아들이 죽은 후에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고퍼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예배하고 궁으로 들어가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조금 기도하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기까지 하는 자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모하기를 과연 목마름 같이 하여 이른 아침마다 일찌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평안한 자리와 단잠이 감히 다윗의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결박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일생은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기도의 사람이 능력의 사람이요, 기도하는 곳이 능력이 이르는 곳이요, 기도하는 때가 능력 받는 때입니다. 2. 용감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다윗의 일생이야말로 신앙의 일생입니다. 다윗의 가슴 속에는 불붙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소년시절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 중에 있었습니다.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은 거인이요, 감히 그에게 대항할 사람은 천하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용감한 믿음의 사람 다윗은 어린 몸에 출전을 자원했습니다. 어린 다윗의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블레셋인에게 나아갔습니다.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지라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다윗입니다. 믿음이 커야 위대한 사람입니다. 완전무장을 하고 서있는, 힘이 센 블레셋 나라의 골리앗 장군은 아무도 대항할 수 없는 굉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칼이 아니길 목자의 지팡이를, 활 대신에 물매 돌, 화살통이 아니라 목자의 제구 주머니를 가지고 나가 섰습니다. 확실히 다윗은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만 전적으로 믿고 나갔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리라고 했습니다(삼상 17:47). 다윗이 믿음으로 던진 돌매 돌은 골리앗을 눕히고 말았습니다. 역사를 기대하기 위하여 위대한 믿음부터 소유해야 합니다. 모든 어려움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부터 확인하고 다가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이 가진 것이 아무리 커봤자 사람의 눈에만 위대하게 보일 뿐, 실은 다윗처럼 믿음이 큰 자가 가장 위대한 자인 것입니다. 시편 전체의 내용 중에 흐르고 있는 다윗의 생활을 살펴보면 그의 눈은 항상 하나님을 찾아 헤메이고 있었으며, 그의 입은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의 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만 전념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큰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을 수가 있었고 그 때마다 승리의 삶으로 일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보다 더 위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눅 17:6에 “ 너희가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뽕나무 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리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리라 ” 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강한 헷 족속을 정복하고 통일되지 못한 각 지파를 통일하여 홍해와 유프라데강 사이에 일대 왕국을 건설한 것은 저의 무력과 정치적 수완에 있는 것보다도 저의 종교이며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실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가였습니다. 3. 회개의 사람입니다 사람의 위대함을 성공에서만 찾아볼 것이 아니라 실패 속에서도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약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라고서 범죄할 가능성이 아주 떠나가 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 약한 인간 속에 믿음이 들어와서 크게 역사하고 있으나 그 사람의 지체 속에는 항상 원치 않는 다른 하나의 악도 공존하고 있어서 범죄할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바울도 한 가지 법을 깨달았는데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라고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롬 7:21). 그래서 그는 이와 같은 상태를 롬 7:24-27에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람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저내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고 하였습니다. 옳습니다. 믿음의 사람도 육의 몸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윗 같은 믿음의 사람인데도 한 번 잘못 디딘 발걸음이 함정에 들어가 버리고 말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임금이 된 후, 어느 날 왕궁 지붕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았고, 그 여인을 취하여 범죄하더니, 지은 죄를 숨기기 위하여 전방에 있는 우리아를 불러 호의를 베푸는 척 위선자로 전락하였고,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우리아를 최전방에 보내어서 전사케 하였고, 나단 선지자의 비유 앞에서 남의 일처럼 철면피하게 강팍한 심령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가 “ 당신이 그 사람이라 ” 고 하였을 때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된 내가 과연 죄를 범하였나이다 라고 회개했습니다. 여기 이와 같은 장면에서 우리들은 다윗의 최고의 위대함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사람은 죄를 회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만일 다윗이 회개할 수 있는 내적인 바탕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상태에서 나단이 죄를 지적하였다면, 나단은 헤롯 왕 앞에서 목이 달아난 세례 요한의 꼴이 되고야 말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용납 못할 죄를 범했으나, 여기 나단 앞에서 회개하는 다윗 왕의 모습은 너무도 위대하게 보입니다. 이 때 회개한 시로 널리 알려진 시편 51편을 보면 “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 고 했습니다. 다윗은 죄로 인하여 파산된 인격을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이와같이 회개하는 눈물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시는 힘이 있어서 사유하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철학자 베이컨은 “ 초목은 자라기 위하여 이슬에 젖고, 인생은 영생을 위하여 회개의 눈물에 젖어야 한다 ”고 했습니다. 회개하는 곳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머무는 것입니다. 다윗이야말로 무서운 범죄를 한 사람이었으나 실패의 함정에서 끝난 사람이 아니라 사랑의 창공에서 빛나고 있는 사유해 주시는 은총의 별을 보고 일어나서 회개의 발걸음으로 소망의 항구까지 이르렀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은 죄를 안고 쓰러져 있지 마시고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려고 오신 십자가의 주님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마 9:12-13에 “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의인을 위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요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세워진 곳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은총을 받지 않은 고집입니다. 충고를 받지 않은 만남이 그랬고, 헤롯이 그랬으며, 충고 받지 않은 사울이 망했느냐, 충고를 잘 받은 다윗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4. 관용성이 넓은 다윗입니다 (1)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했습니다. 다윗이 나라를 골리앗의 손에서 구원해 냄으로써 받은 인기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의 마음에는 국가에 세운 공로보다 시기심이 강하여 다윗을 죽일 마음을 가졌습니다. 약속대로 사위를 삼고도 죽일 마음이 그대로 입니다. 일국의 왕이 일개 목동 아이 하나 처치하는데 무슨 난관이 있을까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2) 십여차례 죽이려 했습니다. 나중에는 다윗이 엔게데 굴 속에 숨었는데 사울이 그 산을 포위하고 찾다가 굴 밑에서 잠을 잤는데 다윗의 동행자들이 하나님이 사울을 죽이라고 이렇게 기회를 준 것이라 하여 창으로 찌르려하니 다윗이 만류하고 칼로 사울의 외투자락을 베어다가 사울이 물러나 저 앞산 건너로 가자 다윗은 “ 대왕이여 그 옷자락을 보소서 그 조각이 여기 있나이다 ” 했습니다. (3) 망명생활의 세 가지 미덕입니다. 첫째, 기름 부어 세운신 이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으심니다다. 둘째, 왕위를 어디까지나 귀중히 여겨야 한다고 하여 끝까지 받들었습니다. 세째, 심판하실 이는 하나님이시니 나는 내 할 일만 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5. 결산을 아름답게 하는 다윗입니다 기업하는 사람이 중간 결산의 보고서를 쉽게 평가하거나 속단해저는 안됩니다. 끝까지 해 보고 최후의 결산을 보고 하여야 합니다. 마라톤 경주는 마지막 최후의 종점에 가서 말하여야 합니다. 초반에 앞섰던 사람이 후반에 가서 뒤떨어질 수도 있으며, 반대로 초반에 뒤졌던 사람이 후반에 가서는 잘 뛰어서 최후에는 입상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굴곡이 많습니다. 끝까지 다 산 후에 결산을 해 볼 일입니다. 요나 같은 선지자도 처음에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니느웨로 가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다시스로 가다가 고기배 안에서 3일 주야 고난 받게 될 때 회개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다시 임하시매 그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 성에 가서 그의 사명을 다 감당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한 때 주를 모른다고 맹세하여 저주까지 하였고(마 26:69-75), 십자가를 떠났으나 다시 돌아와서 거꾸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생을 아름답게 결산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을 때에는 그의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음으로 무서운 진노가 임하기도 하였습니다(삼하 11:12). 그러나 그가 회개하였을 때 여호와께서 다윗을 다시 사랑했습니다(삼하 12:25). 그리하여 그가 회개하였기에 그의 왕권은 끝나지 아니하고 계속되어 40년의 장기권을 집권하고(왕상 2:10) 최후의 삶은 아름답게 결산될 수 있었습니다. 왕상 2장에 보면 다윗 왕은 옛날의 신앙을 완전히 회복하고도 남음이 있어서 죽을 날이 임박하였을 때 그의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왕권을 넘겨주면서 신앙을 유산으로 상속시켜 주고 있었습니다. 누가 위대한 사람입니까? 다윗 같이 최후의 결산이 아름다워야 위대한 사람입니다. 마지막 최후까지 하나님이 쓰시다가 데려가는 자가 있으며, 범뵈하고 회개하지 못함으로 최후까지 쓰임 받지 못하고 버림받는 일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아름다운 생의 결산에서 그의 위대함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 다윗의 위대한 생을 찾아보면서 위대한 생으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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