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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을 악으로 갚음 (삼하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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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장에서는 선을 악으로 갚은 암몬의 왕인 하눈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암몬 자손의 왕인 나하스가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하눈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다윗이 나하스에게 도움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2절에 보면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나하스라는 이름은 뱀을 의미하며 몇몇 암몬 족의 왕들에 의하여 취해진 이름이던 것 같습니다. 나하스는 사울의 원수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사울의 세력으로 인하여 당했던 패배의 상처가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다윗에게 은총을 베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가 받은 은총을 생각하여 조문객을 암몬 땅에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사는 방백들은 하눈을 충돌질 하였습니다. 3절에 보면 “왕은 다윗이 조객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 신복을 보내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까”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 방백들이 이렇게 말함은 전쟁에서 다윗이 승리하자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나라를 불신하는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암몬의 새 왕인 하눈은 귀가 옅은 사람인 듯 합니다. 생각도 해 보지도 않고 그냥 다윗의 신복을 잡아서 수염을 절반을 깎아버렸습니다. 동양인에게 수염은 자신이 자유인이라는 표시이며, 이렇게 함은 단순한 모욕이 아니라 노예로 취급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염만 깎은 것이 아니라 그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잘랐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만이 속옷을 입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평상복은 윗옷과 그 위에 헐렁하게 걸치는 겉옷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동불기까지 잘랐다는 것은 엉덩이 바로 위까지 자른 것으로 하반신을 다 드러내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히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 수치스럽고도 지독스러운 모욕이었던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볼 수 있지만 노아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은 채로 있었는데 노아의 아들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자 두 형제는 옷을 취하여 뒷걸음질쳐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다고 하였습니다(창 9:20-23). 그 결과 아비의 하체를 본 가나안의 아비 함은 자기 형제들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만큼 하체를 드러내는 것은 커다란 수치였던 것입니다. 하눈이 이렇게 행한 것은 다윗에게 전쟁의 선전포고를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의 신복들이 그런 모욕을 당하고 돌아온 것은 다윗 자신을 모욕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신복들이 그런 일을 당하고 부끄러워하자 다윗은 그들을 여리고로 가서 수염이 자라기까지 머물러 있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5절). 여기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몇 가지 사실들이 있습니다. 1. 선을 선으로 갚은 것입니다 성경에는 전에 다윗이 나하스에게 도움 받은 사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다윗은 그 사실을 깊이 간직 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기에 나하스가 죽자 자신이 받은 친절을 생각하여 조문객을 보내었던 것입니다. 요즈음의 시대에서는 우리에게 주어졌던 많은 친절들이 복잡한 사회 속에서, 또 삶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받은 친절에 대하여 거의 잊어버리거나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윗은 암몬 왕의 호의에 대해서만 은혜를 갚은 것이 아니라 삼하 9장에도 기록되었지만, 자신이 요나단의 도움을 받은 것을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사울과 그 온 집의 재산을 다 돌려주고 그가 두 발이 다 절뚝발이라고 하였는데도 자기 상에서 같이 먹으라고 하였으며 왕자 중의 하나처럼 대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인정이 있는 행위입니까? 우리가 선을 베푼 것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고 그냥 묻혀버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선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받은 선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갚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다 다윗의 호의는 진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호의를 받는 편에서는 교활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 호의가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호의는 오히려 악으로 가득찬 앙갚음을 받게 되었고 멸시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로부터 계속해서 오해를 받았고 백성들이 다윗을 따르는 것을 시기하여 죽이고자까지 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도 많은 사랑으로 우리 인간들을 대하셨지만 오히려 그 사랑하신 사람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게 되셨던 것을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선한 사람들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탄의 세력이 더 강하기 때문에 어두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선이라는 것을 알려고 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위에서 다윗을 모함한다고 하여 거기 솔깃하여 다윗의 신복들에게 모욕을 준 하눈은 진실 된 것을 보지 못하는 무지한 자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가슴에는 상대편 사람들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온전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을 때 상상은 어떤 가능한 동기들을 바라보게 되고 그것은 좋은 쪽보다는 나쁜 면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하눈과 암몬 사람들의 거짓되고 악한 의도는 다윗의 행동을 잘못 판단하여서 우호적인 행위를 그들 자신을 스스로 파멸의 자리에 몰아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각 개인들에게 가장 비참한 저주의 상황으로 나타날 것이기도 합니다. 또 그리스도의 호의에 대한 방자한 배척이기도 합니다. 선을 악으로 갚음은 최고의 손실을 수반하는 법입니다. 곧 그리스도의호의에 대한 배척은 그의 위대성과 영광에 비례하는 손실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3.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편의 사람이 남에게 억울하게 멸시를 당하였거나 모욕을 받으면 기분이 상하게 됩니다. 기분만 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게 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심리인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신복들을 좋은 뜻을 가지고 암몬 땅에 들어가게 하였던 것인데, 그 좋은 뜻은 이루지도 못하고 신복들이 온갖 수치를 다 당하고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보게 됩니다. 다윗은 자기의 신복들이 하눈에게 많은 수치를 당했지만 결코 하눈을 나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도 않고 자기의 신복들을 여리고로 보내어 수염이 자랄 때까지 그 곳에 머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하게 처리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오히려 덮어 주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호의가 그렇게 무참히 거부당하였다는 것은 다윗에게 있어서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기에 오히려 다윗에게는 더 많은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고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선한 일들이 남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고 오히려 분쟁의 원인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건져내시며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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