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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도니야의 야심 (왕상 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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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제 1장에는 솔로몬 왕의 등극을 전후하여 다윗 왕이 노년에 아비삭에게 봉양을 받는 내용과 아도니야가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되려고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솔로몬 왕은 다윗 왕의 서거 이후에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다윗 왕의 노쇠한 틈을 탄 아도니야의 반란으로 솔로몬은 급히 왕위에 올라야 했던 것입니다. 본문은 1절에서 “다윗 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라고 시작을 합니다. 이는 노년기의 일반적인 현상인 것 인데 다윗 왕의 청년시기의 고생과 중년 때에 겪었던 전쟁에서의 비애와 근심으로 그를 더욱 늙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윗 왕의 신복들이 젊은 처녀 수넴 여자 아비삭을 다윗 왕에게 데려와 그를 봉양케 하였으나 왕은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의 이러한 노쇠한 모습은 아도니야로 하여금 야심을 품게 하였으며, 결국 아도니야는 스스로 왕이 되리라 하고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 인을 예비하기에 이르렀던 것 입니다. 또한 아도니야는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였으며, 향연을 베푸는데 그는 솔로몬을 제외한 자기의 모든 동생들과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의 용사들을 제외한 왕의 신복 모든 사람들을 다 청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도니야의 음모는 결국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아도니야의 야심은 모든 인간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인 것입니다. 1. 아도니야는 스스로 높이는 자였습니다. 5절에 보면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도니야는 다윗 왕의 넷째 아들이었으나 그때까지의 생존자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았습니다. 첫째 암몬은 죽었고 (삼하 13:29), 둘째 다니엘은 어려서 죽었으며 (대상 3:1), 셋째 압살롬도 죽었던 (삼하 18:14) 것입니다. 그래서 아도니야는 다윗 왕의 장자권을 주장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장자는 갑절의 분깃을 받는 것인데 그러므로 그가 왕위를 바라보는 것은 무리한 생각이 아닌 것입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 죽고 여호람이 그 왕위를 이어 받게 되는데 이는 여호람이 장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대하 21:3). 그러나 왕위 계승권은 꼭 장자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다윗도 장자가 아닌 말째였습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왕을 선택하는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도니야는 스스로 높여서 왕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교만하여서 다윗에 이어서 솔로몬이 왕이 된다(삼하 7:12, 대상 22:9, 10)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높이는 자는 참으로 교만한 자입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신 8:14) 매를 자청하는 자 (잠 14:3)이며, 저주를 받게 (시 119:21) 되는 것입니다. 아도니야는 스스로 높여서 자신의 힘으로 장자권 즉 왕위를 찬탈하려 했던 것입니다. 2. 아도니야는 체용이 준수 했습니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 교만해진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용모가 매우 뛰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아도니야에게 한 번도 섭섭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의 용모가 출중하여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를 크게 칭찬했는데 (삼하 14:25) 이것이 압살롬을 교만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도니야의 경우는 압살롬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합니다. 칭찬을 들을 때 조심해야 됩니다. 그 때는 바로 자신을 돌아보며 겸손해야 할 때 입니다. 그의 용모는 야심을 품게 되었고 많은 사람이 따르게 되는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겉모습이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워도 그 중심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못하다면 오히려 이러한 외모는 자신에게 해가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시는 관점은 외모에 있지 않고 중심에 있기 (심상16:7) 때문입니다. 외모는 사람의 눈으로 보는 판단을 뜻하는데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들의 객관적인 판단에 출중해 보이는 자가 아니라 그의 중심이 하나님께 향한 자인 것입니다. 3. 아도니야는 아버지로부터 한 번도 섭섭한 말을 들어보지 못한 자입니다. 이는 다윗 왕의 실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윗 왕은 자녀들을 똑바로 훈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도니야의 외모가 출중한데서 다윗은 그릇 편애한 것 같습니다. 부모의 이러한 자녀 교육은 그 자녀로 하여금 교만하여 자아 중심적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 (창 33:5)이요, 여호와가 주신 기업 (시 127:3-5)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셨을 때에는 그에 대한 부모의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엡 6:4에 보면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의 자녀를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일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도니야는 자기의 외모만 보고 스스로 높이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4. 아도니야는 향연을 베풀었습니다 이 향연은 압살롬의 경우 (삼하 15:21) 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아도니야는 자신의 음모를 감추려고 종교적 제사를 가장한 향연을 베풀었으며, 한편으로는 이런 잔치를 통해서 자신의지지 세력을 결속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9절의 ‘소헬렛 돌’은 자연 그대로의 제단이며, 여기서 소와 송아지를 잡고 자기의 동생들과 모든 왕의 신복들을 다 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초청에는 솔로몬과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의 용사들이 빠져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아도니야는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솔로몬에 대한 다윗 왕의 의중과 그 약속을 이미 알았으며, 나단이 솔로몬에게 지어준 이름 (여디디야:여호와께서 사랑하심, 삼하 12:25)과 나단의 예언 (삼하 7:12, 대상 22:9, 10) 등으로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 왕이 되리라는 것을 아도니야는 알았던 것입니다. 또 그는 솔로몬을 따르는 자가 누구인지 잘 알았습니다. 아도니야를 따르는 자는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이었으며,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사므이와 레이와 다윗에 속한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아도니야를 따르는 자들은 기회주의자들입니다. 다윗의 노쇠함과 아도니야의 외모를 보고 반정 모의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압살롬의 반란에서 이러한 자들을 어떻게 처리하셨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윗 왕이 노쇠함을 틈타 왕이 되려고 스스로 높이는 아도니야와 그의 외모만 보고 추종하는 기회주의자들은 반정모의를 하게 되는데, 이는 인간의 교만한 모습과 기회주의적인 죄 된 습성에서 출발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외모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려는 것은 범하기 쉬운 죄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겸손해야 하겠지만, 칭찬받을 만할 때 더욱 겸손해야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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