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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엘리야와 아합과 나봇의 포도원 (왕상 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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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에 있어서는 종교가 정치나 상업이나 경제적 생활의 일반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성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삶은 하나였습니다. 한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한 사회의 구조 안에서의 한 사람과 다른 사람들과의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관계들은 다 얽혀 있었고 한 개로 나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이 그렇다고 하는 것은 이세벨이 페니기아의 바알신 예배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들여오라고 한 것으로도 증명이 됩니다. 이세벨은 그 백성들의 단순하고 뒤떨어진 민주주의적 방식을 경멸하고, 그가 익숙해지고 또 고대 근동 세계의 다른 개화된 국가들의 특징이었던 독재적 정부를 그들에게 강요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지식이 또한 엘리야와 그를 따르는 이들이 그녀에게 저항한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여호와는 단순히 히브리 사람들의 조상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사회 체계와 그것을 지배하는 법의 옹호자였습니다. 압력은 단순히 보다 큰 투쟁 속에 있는 하나의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 구성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순전히 “종교적” 이라고 할 수 있는 투쟁의 한 면이 갈멜산의 싸움의 이야기에서 극적으로 표현되었다면 다른 면 즉 “사회적”인 면을 나봇의 포도원의 이야기에서 각색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에게 있어서나 이세벨에게 있어서, 그리고 또한 모든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두 개의 다른 일이 아니고, 타협이나 부분적 해결이 있을 수가 없는 하나의 불가분의 싸움의 단순한 두 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갈멜산 및 기손강 연안 일대의 땅으로 거기에 있는 포도원은 좋은 포도의 산출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에스드랄론의 기름진 평야에 자리 잡은 곳으로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제 2 수도였습니다. 여기에 아합 왕은 왕궁과 화려한 사유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봇의 포도원은 바로 거기에 인접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왕의 소유들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기에 아주 알맞은 자리에 있는 훌륭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에 대해서는 불행하게도 그 토지는 히브리 사람들의 습관에 따라서 단순히 나봇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통하여 나봇의 전 가족에게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땅의 소유권은 가족단위의 것으로 독립된 주요한 보호물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의 법 아래에서는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나봇은 그 포도원을 파는 것이나 거래하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하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토지거래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입니다(민 36:7-8). 십계명의 제 10조인 출 20:17에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 아합은 그 이웃의 포도원을 탐내어 이것을 자기의 것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나는 국왕이다. 그러므로 나는 법률 이상이다. 내게는 하고자 하는 일로 안될 일이란 있을 수 없다. 또 내 백성으로서 내 명을 거스리는 자는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합은 나봇에게 권위와 이득으로 그 포도원을 얻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봇은 왕의 권위보다 율법의 권위를 더 귀히 여겼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레 25:23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하나님의 것임이니라” 고 했고, 민 36:7에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각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킬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나봇은 율법에 의해 아합 왕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재해를 자기 몸에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왕은 노하였고, 식사를 폐했습니다. 그는 그의 명령을 거절하는 자가 나라 안에 있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린아이처럼 안타까워하며 오로지 그 하찮은 욕망이 달성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사건은 구약 종교 정신의 중요한 면을 나타냅니다. 즉 보잘 것 없는 시민이 왕에게 반항하고 왕은 다만 그의 궁에 들어와서 그것을 못마땅해 할 뿐이었습니다. 이 때 요부 이세벨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사태를 이세벨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직접적으로 히브리 사회의 율법에 도전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왕으로 하여금 간접적으로 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할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세벨은 왕에게 “왕은 국왕이 아니니이까? 그리고 국왕으로서 국내에서 못할 것이 있으리이까? 일어나소서 근심하지 마소서 나봇이 거절한 대도, 율법은 금한대도, 나는 내 계략으로써 당신의 바라는 것을 당신에게 드리리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세벨의 계략은 대담하고 단순했습니다. 관서를 사조(私造)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나봇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 일은 주저하는 일 없이 저가 바라는 대로 실행했습니다. 불행합니다. 나봇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악한 두 사람에 의해 국적(國賊) 불경한의 이름이 씌워져 민중에 의해 돌을 맞고 죽었습니다. 23절에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이세벨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도 저는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다가 무고한 자를 죽인 것입니다. 이세벨은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하며 허위의 증인들을 고용했습니다. 히브리법에는 두 사람의 증인이 필요했습니다(신 17:6). 그 다음 이세벨은 그 고소한 내용이 중대한 성격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민중의 단식을 선포하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저주는 단순히 말의 형식이 아니라, 강력한 마술적 무기였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효력은 다만 그와 똑같이 강력한 대책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을 증오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이스라엘 장로와 귀인입니다. 그들은 나봇과 동읍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참소함의 무고를 보면서도 한 마디도 그를 위해 변호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알면서도 그로 하여금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일어나서 왕과 백성을 책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세벨은 마음으로 내가 내 지혜와 권력으로써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고 말했을 것입니다. 국민들은 소리를 죽여 가며 이제 불의에 항거한대도 쓸데없으며, 다만 각자 자신을 지켜 왕의 분노를 사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를 엘리야로 호렙산에서 돌아온 이래 갈멜산에 은신하여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에 무고한 피가 냉혹하게 흘려졌다는 것을 듣고 마침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합이 사마리아를 나와 이스라엘에 들어감과 동시에 엘리야는 갈멜산을 나와 한 가지로 나봇의 성으로 내려갔습니다. 마치 대군이 산을 내려와 왕을 영격(迎擊)하려는 것 같습니다. 엘리야가 나봇의 포도원에서 아합과 마주쳤습니다. 아합은 이 일이 있을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엘리야에게 말했습니다. 20절에 “아 내 대적이여 네가 나를 찾아냈는가” 하고 말하였습니다. 엘리야는 꺼리는 일 없이 아합 왕을 책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형벌을 아합에게 던졌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공평한 것입니다. 살인자는 살해될 것입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은 죽임을 당하고 또 빼앗길 것이라고 말하는 엘리야는 하나님의 공의를 가졌을 뿐, 몸에 아무런 무기도 휴대하지 않았지만, 강하기가 구리성과 같았습니다. 엘리야의 힐책과 저주에 직면하여 아합은 크게 죄를 뉘우쳤습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상한 마음을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악을 쌓은 아합 같은 경우에서도 그렇습니다. 아합의 죄는 많이 경감되었습니다. 그의 집은 그가 생존 중에 멸절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와 이세벨은 나봇의 참사와 비슷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고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는 국왕이나 신하도 한 가지로 정죄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분은 국왕이 아니라 여호와이십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그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그 왕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힘을 믿을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만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을 다스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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