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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추억 (욥 29: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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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행복했거나 불행했거나 이미 흘러간 옛날의 추억은 때때로 우리들의 마음 속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감회를 불러 일으킵니다. 현실이 불행하던지 또 우리 몸이 병들거나 늙어졌을 때 그 추억은 더욱 찬란해지는 법입니다. 메기의 추억이라는 미국의 민요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에게 애창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멀리 떠나가 버린 목동의 이름을 생각하면서 어머니가 불렀다고 전하는 아일랜드의 민요 “아 목동아”란 노래도, 흑인들의 외로운 심정을 노래한 포스터 작곡인 “켄터키옛집”,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등 그 밖에 많은 노래들이 모두 다 이와 같은 인생의 아름다운 추억을 노래한 것들입니다. 재산, 자녀, 건강, 아내, 친구, 그가 가진 것 다 잃어버리고 버림받고 업신여김 받던 욥의 극도의 고독과 슬픔 속에서 그 옛 일을 추억하면서 그려놓는 한 편의 노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욥기 29장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욥기 29장을 추억의 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3절에 “내가 이전 달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날에 지내던 것 같이 되었으면…… 그 때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취였고, 내가 그 광명을 힘입어 흑암에 행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욥의 이 말은 지난 날에 누렸던 그 자신의 행복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조건은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욥은 인간의 힘으로는 감내하기 어려운 그 무서운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그 옛 날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4절에 “나의 강장하던 날과 같이 지냈으면 그 때는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 위에 있었으며 그 때는 전능자가 오히려 나와 함께 계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정이 자기 집에 있었던 바로 그 때가 자기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강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지금 가장 슬퍼하는 것은 일신상의 고통스러운 현실, 그것보다도 자기가 지금 하나님의 우정에서 멀어져 있다고 하든 바로 그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욥이 온 재산을 잃고, 가족 잃고, 건강 잃고, 친구들에게 멸시받는 것은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이 그 사실보다도 더욱 슬퍼하고 괴로워한 것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과, 그 하나님과 우정이 식어졌다고 하는 사실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인간 이하로 처절한 상태에 있었을 때는 누구보다도 가까웠던 아내마저 그를 조롱했고 먼 길까지 일부러 찾아와서 욥을 위로한다는 옛 친구들까지도 위로한다는 것이 도리어 그 마음을 상하게만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에게서 참된 우정을 찾지 못한 욥이 지난 날에 가졌던 하나님과의 우정을 그리워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 지난 날의 아름답던 추억 7절에 “그 때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베풀기도 하였느니라 나를 보고 소년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서며 방백들은 말을 참고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귀인들은 소리를 금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모두가 그 때의 사람들이 남녀노소 귀천을 막론하고 욥을 환영하고 존경했던 사실을 설명하는 말들입니다. 젊은이들이 욥을 볼 때 자리를 비키고 나이 많은 사람들도 욥을 보면 일어나서 경의를 표했으며 고관이나 귀인들까지도 욥의 면전에서 말을 삼가고 침묵과 정숙으로써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는 얘기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귀가 들으면 자기를 위하여 축복하고, 눈이 본즉 자기를 증거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욥이 차지했던 사회적 명망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21-25절에 “무리는 내 말을 들으며 나의 가르치기를 잠잠히 기다리다가 내가 말한 후에는 그들이 말을 내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딸만 아니라 백성들이 욥이 기다리기를 가뭄에 비를 기다리듯 했으며, 자기가 입을 열기를 늦은 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했다고도 말했습니다. 이토록 욥의 과거는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추억은 보람된 사회생활이 장식해 주는 것입니다 11절에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느니라 내가 의로 옷을 찾아 입겠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나는 소경의 눈이 되고 절름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꺾고 그 잇 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 내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생각컨데 욥은 당대에 있어서 위대한 지도자요, 백성의 의승인 동시에 한 사람의 위대한 사회사업가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는 결코 자기의 부귀로 말미암아 가난한 사람을 업수히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부요한 욥은 자기 재산으로 헐벗고 굶주리는 빈민을 구제했고,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고아와 과부들을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잠 19:22에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욥은 이렇게 높은 사회적 신분에도 추호의 교만함 없이 천한 인간들에 대하여 친절하고 인자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에 그 인격은 한없이 승화되었던 것입니다. 소경의 길잡이가 되어 주기도 했고, 억울한 자의 보호자가 되어 주기도 했던 지난 날의 욥, 이러한 욥의 아름다웠던 옛 추억은 사경에서 신음하고 있던 그 자신에게 한 때는 보다 더 큰 실망과 슬픔을 주기도 했었습니다. 욥의 현실은 그의 아름다웠던 옛 추억과는 너무도 상반된 것이기 때문에 욥의 고통과 슬픔은 한층 더 무거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능히 견뎌낼 수 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3. 욥은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였기 때문에 고난 중에서도 행복 했습니다 (1) 종교적 행복 종교적 행복이 제일 귀한 행복인데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연인들은 행복을 세속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 안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 점이 욥의 성도다운 점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과의 생활을 추억했습니다. 부부 사이의 사랑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호해 주시던 때의 추억을 말합니다. 3절에 “등불이 자기 머리에 비취었다”고 합니다. 위에서 비취었다는 말입니다. 시 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4절에 하나님의 우정이 자기 장막 위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로 계셨습니다. 사 41:8에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너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했습니다. 약 2:23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했습니다. 요 15:15에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으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모든 비밀을 다 알려주셨습니다. 창 18:17에 소돔성을 심판할 때 “내가 하는 일을 네게 숨기겠느냐”라고 하시면서 알려주었습니다. 암 3:7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느니라”고 했고, 시 12:14에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라고 했고, 잠 3:32에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깊이 친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2) 가정적 행복 우리의 가정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공산 세계와 독재자의 세계에서는 가정을 무시합니다. 자유 세계가 공산 세계보다 좋은 것은 가정의 행복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가까운 사회일수록 가정의 행복을 존중합니다. 성경은 가정을 돌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악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녀. 내 부모 사랑하기를 불신자들에게 본이 되도록 사랑해야 합니다. 창 23:2에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었을 때 많이 울었습니다. 뜨겁게 사랑했던 증거입니다. 대개 불량 소년들의 통계를 보면 사랑을 모르고 자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는 언제나 사랑이 넘쳐야 합니다. 시 128:3에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돌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3) 시민의 존경을 받았던 추억입니다. 옛날 성문은 재판하는 곳입니다. 왕상 21:11에 이세벨의 사자와 장로들과 귀인들이 성문에 모여 재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욥은 그 고을에서 유력한 심판자였음을 알 수 있으며 공의로운 판결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지난 날의 추억은 하나님과 함께 지내온 세월이었기에 욥에게는 무척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추억이 있기에 욥읍 자신의 지난 날을 돌아보며 다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고 고난을 인내할 힘과 소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가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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