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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는 나의 반석 (시 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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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에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니”라 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다윗의 고백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뜨거운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많은 시는 그의 구원 체험을 많이 말하고 있으며 그 체험에 따라 그는 하나님과 자기와의 밀접한 관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체험은 신앙을 확고히 하여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체험을 신앙의 모체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의 모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체험은 신앙의 아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에 체험이 생기는 법입니다. 이 체험이 그것을 낳아준 신앙을 다시 도와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귀한 체험을 하지 못하는 데는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의롭다 생각하는 생활입니다. 만일, (1) 우리가 멸망받을 죄인인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사실을 명백히 체험하게 되며 (2) 우리가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줄 알고 살아왔으면 이때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에 대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하려면 스스로 의롭다는 악한 정신을 철저히 없애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어야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반석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교회가 세워지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고 좌우에 날 선 검보다 예리하며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지기까지 하며 또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들어나는지라(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계신 말씀이므로 능력이 있고 이 말씀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권세를 부여 받았습니다. 전하는 자는 부족하나 이 말씀이 지닌 능력 때문에 이 말씀을 듣는 심령이 살고, 가정이 살고, 민족과 국가가 살게 됩니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이처럼 능력있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벙어리 될 때, 교회는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의 반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2. 반석이 되신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입니다 반석이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셀라”라고 하는데 아라비아어로는 “쌀스운이라함”이라고 하며, 그 뜻은 험한 암벽으로 둘러싸인 땅을 의미합니다. 이런 땅은 피난처로써 적합합니다. 요새라는 말은 “매츄다”인데 거기에 해당한 아라비아 말 “마차둔”의 의미를 앎으로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아라비아 말 “마차둔”은 높은언덕 혹은 산 꼭대기를 의미합니다. 이것도 그 시대에 있어서는 적군의 내습을 미리 알고 잘 방어하기 위한 망대요, 요새였습니다. 하나님은 반석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리고 위급에 직면했을 때 구원자도 되십니다. 하나님이란 엘로힘의 성호는 창조주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니 모든 능력의 원천이요, 공급자란 뜻입니다. 3. 반석이신 주님만을 의지할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구주가 있다면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는 실패할지 모릅니다. 그의 원수들이 다른 구주를 의지하여 그를 이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구주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아야합니다. 잠잠히 바라본다 함은 요동 없이 힘있게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사람이 언제나 선한 일을 침묵으로 실행함은 신념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침묵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 외에는 다른 모든 일들은 불필요한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를 침묵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세상이 아무리 떠들며 방해하여도 나는 내할 일만 힘있게 해나간다는 태도입니다. 성도는 원수들의 모든 방해 운동 가운데서도 아무런 동요의 태도 없이 일편단심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침묵의 태도를 원수들앞에서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그는 침묵하시므로 장차 무너질 잔인한 교권주의에 대처하였습니다(마 26:63). 그는 헤롯 앞에서 또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셨습니다(눅 23:9, 요 19:9).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자는 모든 장애물 가운데서 그 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침묵 정진합니다. 순교자 후스가 죽은 뒤에 보혜미야에서는 후스의 신앙을 따르는 자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들 중에는 지스카란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병기를 가지고 달려드는 로마교 군대를 대항하여 싸우던 중 소경이 되었지만 낙심하거나 마음에 동요를 받지 않고 끝까지 항전하여 승리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자는 그의 옳은 사업에 있어서 꾸준히 계속하며 요동하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나의 반석으로 사는 자는 2절과 6절에 있는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고 한 말씀대로 승리의 생을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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