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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일이 있는 삶 (렘 3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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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예언자는 유대가 멸망해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것도 자신이 옥에 같히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련속에서 사람을 시켜 자기의 고향 아나돗에 밭을 사게 하고 땅 문서를 만들어 잘 보관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행위는 포로되어 가는 그의 동족들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 하나멜이 나의 밭을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내일을 파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나돗 사람 하나멜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포위가 예상외로 일시 정지되었을 때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떠나서 자기의 가정 사정 때문에 아나돗에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아마도 자기의 분깃을 받기 위하여 갔을 것입니다”(37:12). 그러나 그는 도망자로서 체포되고 매를 맞고 투옥되었습니다(37:12). 예레미야가 투옥되고 아나돗에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를 찾아왔던 것이 아닙니까? 하나멜은 예레미야의 사촌으로 예레미야와 같은 고향인 아나돗에 살고 있는데, 하루는 옥중에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자기 밭을 사라는 것입니다. 이 귀절은 두 가지 의의깊은 점에서 교훈적입니다.

(1) 첫째로 그것은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말씀”을 어렵게 인정하였던가를 비추어 주었습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읽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우리는 또 읽습니다.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님이 내게로 와서 이르되 나의 밭을 사라.” 마지막으로 이렇게 읽습니다.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줄 알았으므로” 이 배우는 경험에 있어서 현저한 것은 순서입니다. 예레미야가 아나돗에 가려고 했으나 가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는 동생이 온다는 예감을 갖고 그것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확인하였습니다. 그는 왔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말과 똑같은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나는 알았으므로”라는 말로 끝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하여 행위도 똑같이 교훈적입니다. 하나멜이 예레미야에게 자기 밭을 사라고 한 이유는, 때는 예주살렘의 멸망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시드기야 왕 제 12년이었고 바벨론 군대가 이미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때라 시간이 문제일 뿐 예루살렘의 멸망은 기정사실이었습니다. 이런 때에 밭을 가지고 있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한 푼이라도 철금으로 만들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래서 하나멜은 그의 친족 중 상속권 제일 후보자인 예레미야에게 자기 밭을 사 달라는 제안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불일간 예루살렘은 함락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언제 다시 돌아와서 이 밭에 농사하겠느냐는 생각에서입니다. 과연 약삭빠른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일을 파는, 그래서 내일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2) 둘째로 이 귀절은 땅을 무르는 뷸법 그것으로써 친족들이 소유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멸망을 예증하고 있습니다(레 25:25-28, 롯 3:6-4:12). 예레미야는 이것을 목적으로 아나돗에 가려고 하였던가? 아무튼 소유권과 땅을 무를 수 있는 권리는 그의 것이었습니다.

2. 그래서 예레미야는 밭을 샀습니다 이 이상한 거래가 기록되어 있는 세목의 정확성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특정한 가격 은을 다는 것, 증인 앞에서의 서명, 봉인이 없는 사본과 봉인이 있는 사본, 증인들의 서명, 구경하고 있는 군중, 쌍방의 문서를 흙으로 만든 그릇에 넣어 두는 것, 선언권 행동의 의미, 죄수가 가질 수 있었던 재산 등,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이 책 전체 가운데서 가장 매력 있는 삽화의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주위에 있는 나라 전체가 적의 손에 있을 바로 그 때에 땅을 샀다는 사실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측의 이 행위는 단순한 투자가 아니었고 특별한 상징적 의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백성들의 장래가 그들이 자기 나라로 분명히 돌아간다는 사실에 대한 예레미야의 확신을 웅변적으로 극화한 것입니다. 15절에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하라.” 예레미야는 주저하지 않고 하나멜의 밭을 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바보스러운 짓같이 보입니다. 예레미야는 미혼이기 때문에 처자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무엇에 쓰려고 밭을 사는 것일까요,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는 하나멜의 최우선 상속권 자이기 때문에 밭을 사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동적으로 예레미야에게 상속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없는 돈으로 밭을 사느라고 공연히 수고를 하느냐는 말입니다. 더구나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리라는 예언을 한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 자신인데 이 판국에 밭을 사들이라니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내일을 바라보는 소망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국패민망의 쓴 잔을 마실 수밖에 없지마는 언젠가 반드시 돌아와서 이 밭에 농사할 날이 있을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오늘을 투자하여 내일 산 것입니다.

3. 내일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생활의 차이 내일이 있는 삶과 내일이 없는 삶 사이에는 이같이 현격한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혹자는 오늘에 도취되어 내일을 있는가 하면 혹자는 오늘에 지쳐서 내일을 체념하기도 합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그 결과가 비참하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일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저 오늘만 살면 그리고 나만 살면 된다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내일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에게 절망이 없음은 밤중에도 새벽을 내다보기 때문이요, 그에게 방자가 없음은 심은대로 거둘 날을 직시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강력한 대열은 내일 향해서 전진하는 대열입니다. 우리 다같이 예레미야처럼 하나멜의 발을 사들이시기 바랍니다. 오늘을 투자하여 내일을 비축할 줄 아는 사람만이 오늘과 내일을 함께 복되게 할 수 있으며 나와 남을 다같이 유익하게 만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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