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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대 회복을 위한 기도 (애 05: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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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본문에서 절망의 상태중에서도 어떻게 희망이 생겨나는가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계약의 백성의 놀랄만한 역경은 신앙의 불을 끄지 못하고 오히려 매맞은 백성이 계시된 계약의 하나님의 성격을 믿는다고 재확인 하였을 때에 그들의 재산을 다시 채우게 되었습니다. 이 영광스런 성질은 율법 가운데서 선언되었고 또한 예언자들에 의하여 선포되었습니다. 렘애 1:1-2에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이는 시온의 빛나던 거리가 처량하게 되고 영광의 빛나던 예루살렘이 환란과 군박을 당하게 되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회상한 저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진 선지 예레미야의 애가의 일절입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바와 같이 남방 유대 나라의 서울이요,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은 주전 586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군대로 말미암아 함락되었던 것입니다. 대하 36장에서는 그 당시의 형편을 찾아 본다면 느부갓네살이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백발 노옹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또 하나님의 대소 기병들과 여호와 전의 보물과 왕과 방백들의 보물을 헐며 그 모든 궁실을 불사르며 그 모든 귀한 기명을 훼파 하고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그 성이 소화된 후에 오직 그 백성 중에 빈천한 국민을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 모든 비참한 민족의 운명을 보고 선지자에게 어찌 눈물이 없을수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슬퍼 노래하기를 “여호와여 돌아보옵소서 내가 환란에서 마음이 괴롭고 마음이 번뇌하오니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으로는 칼의 살륙이 있고 집에는 사망 같은 것이 있나이다”라고 하고 안으로 밖으로 당하는 고통을 하소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민족의 행복을 염원하는 애국의 선지자에게 있어서 이는 분명히 비통하기 짝이 없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견딜 수 없는 슬픔을 가지고 자기 동포를 향하여 외치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 밤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추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라고 하며 범죄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등진 무리들이 여호와의 진노를 벗어나 자비와 긍휼하심을 받기 위하여 밤낮 쉬지 않고 참회의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을 주장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한가지로 선지자 자신도 여호와께 눈물의 하소연을 다음과 같이 하였습니다.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손에 받던 아이를 먹이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살육을 당하리이까? 노유는 다 길바닥에 엎드려졌으며 내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 주께서 진노하신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살육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자기 태의 소생을 먹게 되었고 주의 성소에서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제사장과 선지자가 성소에서 살륙을 당하는 이 비극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진노를 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여호와의 진노를 가져왔던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왕과 방백들이 율법 없는 열방 가운데 그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였다”라고 선지자가 말합니다. 그런고로 저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잊어버렸고 저들에게 계시가 끊어졌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저들은 생명의 본체시요 창조자가 되신 여호와 하나님과 절연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 제사가 계속되고 향단의 향연이 피고 있었으나 생명 없는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는 한갖 허레허식에 불과 하였습니다. 계시를 받지 못하는 선지자의 교훈은 생명력이 없는 공염물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고로 공과 의를 행하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은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가운데서는 이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여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고 저들의 형식화한 생명력과 실천력이 없는 종교 생활을 지적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선지자는 오늘 시온의 비참한 불행은 저들의 범죄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고 지적하였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선지자는 이러한 비참한 심판의 비애를 벗어나기 위하여서는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주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을 구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한 개인을 위하는 것만이 아니요, 민족 국가의 행복과 번영을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의 그 행복하고 평화스럽던 모습을 회복함도 하나님의 긍휼을 받음으로만 가능한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길은 오직 참회와 고백과 회개로만 얻을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회와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함이 없는 제사와 기도는 허공을 치는 일과 같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데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고 하였던바 죄인임을 자각하고 주의 자비심을 간구한 세리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돌아갔다고 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선지자는 눈물로서 그 민족에게 호소하였습니다. 회개하고 여호와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계시가 없는 민족에게 과거에 빛나는 역사를 회상시킴으로서 여호와께로 돌아온 개인과 민족 국가의 장래에 대한 소망을 더욱 확실케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선지자는 시온의 현재는 범죄한 결과도 비참하고 굴욕적인 상태에 떨어져 있으나 저들이 범죄하기 이전에,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사기 이전은 영광의 빛나는 역사를 가졌던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정금이 변하였으며 성소의 돌이 각거리 머리에 쏟아졌는고? 시온의 아들들이 보배로와 정금에 비하리니 어피 그리 토기장이의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이와 같이 지난날의 그 존귀와 그 영광은 어디로 가고 오늘의 이 비절 참절한 곤경에 들어갔는가? 이는 단순히 범죄한 까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경각간에 무너지더니 이제 처녀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 보다 중하도다”라고 지적하면서 범죄 이전에 저들이 축복받은 존귀하던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존귀한 자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보다 붉어 그 윤택함이 미광한 청옥같더니 이제는 그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 가죽이 뼈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거리에서 알 사람이 없도다”라고 하여 지난날의 영광과 존귀를 회상케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마지막으로 침착하고 보다 더 신령한 방법으로 자기 민족을 이끌고 나아갑니다. 옛날의 영광과 존귀와 비교할 때 현재 상태가 아무리 비참하다고 하더라도 저들이 영안을 떠서 저들의 죄악을 정시하며 참회하고 회개하므로 옛날의 영광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것을 보기를 기원할 뿐 아니라 선지자는 이러한 모든 일도 인간의 결심이나 어떠한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권고하심이 필요한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고로 선지자는 이제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간절히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발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하고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선지 예레미야가 슬퍼하던 그 민족 국가가 당한 참상은 오늘 우리들의 당면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등진 시온의 참상은 평양이나 함흥의 참상이 아니라 바로 오늘 이 수도 서울의 참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고로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며 이 기도에는 반드시 참회개가 따라야 할 것이며 그러므로 숯보다 더 검은 우리의 얼굴과 가죽이 뼈에 붙어 마른 막대기 같이 된 우리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보다 붉어 그 윤택함이 마광한 청옥 같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고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주께로 돌아와서 저 선지자와 한 가지로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고 진실되이 기도 하여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불변성 19-20절에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그들은 하나님과 그 통치의 영원성에 대한 교리로서 위로합니다. 절망 상태에서도 믿음으로 나가면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계시고 하나님의 보좌가 영원하므로 하나님의 백성을 영원히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 약속을 바라볼 때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징계를 받는 것은 잠시이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패망도 잠깐 지나갈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보좌는 영원한 보좌이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반드시 세워 나가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서 그의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짖을 때 소망이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세세토록 있는 보좌, 영원히 우리를 잊지 않으실 그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소망이 생기고 티끌 가운데서도 다시 일어나 새 생명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2.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대하여 자비와 은혜를 간구키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21-22절에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반드시 징계에서 돌이켜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고 주께로 돌아가기 위해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의 신앙, 옛날의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회복해 주실 것을 믿고 소망으로 간구한 것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상태는 주께서 아주 버린 것과 같고 진노하심이 특심하여 절망 상태이나 영원하신 하나님이 그 약속대로 반드시 건져주실 것을 믿고 소망이 생겼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유다가 다 망한 가운데서 구원의 시기에 대하여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합 2:4에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즉 현재 아무리 예루살렘이 비참한 상태에 빠졌지만 그 상황에서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사54:7-8에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지으므로 죄값으로 망하게 해 놓았으나 그래도 그것은 잠시입니다. 잠시 후에는 다시 영원한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자비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옛날과 같이 우리의 날들을 새롭게 하소서 우리의 선조들이 오래 전에 누리고 장구히 계속되었던 것과 같은 행복한 상태가 되게 하소서 우리를 처음과 같이 본래와 같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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